다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창문

-220908 작성

-6.0 결말 스포일러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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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아실은 창문에 걸쇠를 걸지, 말지 고민했다. 이슈가르드에서는 걸쇠를 풀어뒀다가 밤중에 바람이 불어닥쳐서 얼어 죽을 뻔했지. 울다하와 림사 로민사에서는 도둑이 들었고(잡았지만) 그리다니아에서는 밤새 비가 들이쳐서 마룻바닥을 물어줘야 했다. 유일하게 별일 없었던 곳이 올드 샬레이안이었다. 라자한에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벌써 무서웠다. 아실은 걸쇠를 잘그락거리다 결국 창문을 열어두었다. 등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창문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아실은 눈을 떴다. 불청객은 건물 벽을 두른 턱을 기어 올라온 것 같았다. 달이 밝은 덕에 창문틀을 알록달록하게 채운 색유리 너머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밤손님은 창문턱 사이를 솜씨 좋게 건너뛰며 창문을 한 번씩 밀어보았다. 이 중 하나가 열려 있음을 확신하는 모양새였다. 긴 머리를 대충 묶은 남자의 그림자가 마침내 안으로 들어섰다. 아실은 나직하게 이름을 불렀다. ‘에스티니앙?’

몇 걸음 만에 침대로 성큼 다가오는 걸 보니 불운한 도둑은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나야, 하고 속삭이며 얼굴 위로 머리카락을 드리웠다. 익숙한 체취에서 밤바람이 묻어났다. 이마를 꾹 누르는 입술을 어렴풋이 느끼며 아실은 다시 잠들었다. 날이 밝았을 때는 옆자리에 에스티니앙이 누워 있었다. 아실은 잠에 빠진 미남을 꼼꼼히 훑어본 뒤, 이것이 자신의 소유임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벌거벗은 품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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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니앙은 멀쩡한 문을 놔두고 굳이 창문으로 밤 산책을 다녔다. 용기사단 시절부터 있던 오랜 버릇이라고 했다.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밤이 너무 늦으면 문을 잠그잖냐?’ 산책 시간을 앞당기거나, 문단속하기 전에 돌아올 생각은 없다는 투였다. ‘방을 알면 창문이 더 빠르기도 하고.’ 실용성만을 이유로 숙소 보안을 뚫어버리는 게 전직 푸른 용기사다웠다.

에스티니앙의 동료 중 밤중에 창문을 열어줄 만한 사람은 아실뿐이었다. 혈맹의 현자들과는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았다. 알피노는 이 사실을 알면 걱정할 거고. 알리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쪽은 좀 투덜거리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에스티니앙이 처음 창문을 두드렸을 때, 아실은 자야 하니 조용히 다니라고 짜증을 낸 것 외에는 별다른 타박이 없었다. ‘가끔 창문 열어둘까?’하고 물어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에스티니앙을 따라 밤 산책을 나선 적도 있었다.

울티마 툴레에서 돌아온 뒤의 일이다. 아실은 부상이 나을 때까지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걸어도 된다는 진단을 받고서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의 혈맹은 정해진 운동량을 철저히 지켰다. 에스티니앙에게는 암묵적인 출입 금지령이 내려졌다. 같이 뒀다가 아실이 무리할지도 모른다고 모두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알피노조차 그 의견에 동의해서 에스티니앙은 좀 섭섭했다. ‘내가 그 정도로 상식이 없어 보이냐?’하고 알피노를 쿡쿡 찌르다가, ‘그런데 이건 과보호가 맞긴 해. 그 녀석 슬슬 좀이 쑤실 텐데.’라고 말했던 탓도 있었다.

알피노와 위리앙제를 제외한 사람들이 돌아가며 문지기를 섰다. 알피노는 마음이 약해서, 위리앙제는 근력이 모자라서 에스티니앙을 막지 못할 거란 이유에서였다. 살면서 못 가는 곳이 없었던 전직 푸른 용기사는 매번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돌아가야 했다. 방법이 영 없지는 않았다. 올드 샬레이안의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만만했다. 근처에 가지를 잘 뻗은 나무가 많아서 타고 올라가기도, 몸을 숨기기도 좋았다. 눈 감고도 하지, 이런 건. 벽을 타던 에스티니앙은 잠입 중이라는 것도 잊고 휘파람을 불 뻔했다.

처음엔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는 게 끝이었다. 창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번부터는 걸쇠가 풀려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혼자 걷기 힘든 아실을 부축해주기도 했고, 그가 방에 갇혀있는 동안 아래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얘기해주기도 했다. ‘알리제가 그걸 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더라.’ ‘말조심 좀 해줘. 들키면 걔가 날 죽일 거야.’ 같은 대화도 나누었다. 에스티니앙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일부러 문지기를 귀찮게 굴며 알리바이를 만들었다.

아실이 자꾸 발코니 쪽을 바라본다는 걸 눈치챈 뒤, 에스티니앙은 쿠루루에게 먼저 말을 거는 용기를 발휘했다. 환자의 용태에 관한 정보를 빼낸 뒤에는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다녀올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건물을 오르내리는 과정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 생각 없었다. 사람 하나 업고서 그거 하나 못 하겠느냐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아실의 부상 원인이 워낙 예상외였다 보니, 만일을 위해 그가 팔로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는지는 시험해봐야 했지만 말이다.

대망의 결행일, 아실은 꽤 들떠 보였다. 에스티니앙은 전직 푸른 용기사의 다릿심을 발휘해 나뭇가지와 지붕 사이를 가볍게 뛰어다녔다.

“근데 이러면 들키지 않아?”

“안 들킬걸.”

에스티니앙은 당당하게 헛소리를 했다. ‘내가 이 짓을 오늘 하루만 했겠냐?’ 도시 경비대에게 쫓기다 못해 이제는 수인사를 건네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수상한 사람 취급을 벗은 뒤에도 발데시온 분관으로 날아오는 벌금 고지서는 끊기지 않았지만 말이다. 과장 조금 보태서 퇴직금을 다 여기 쓰겠다 싶을 정도였다.

도착지는 올드 샬레이안 동쪽의 해변이었다. 주택 밀집지라서 계속 지붕을 뛰어다닐 수는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업은 채 예스럽게 포장된 돌길을 성큼성큼 지나고, 모래밭으로 내려가는 비탈길을 단숨에 주파했다. 오랜만에 땅을 밟아서인지 아실은 자기 발로 서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이게 얼마 만이야!’ 정말 기쁜 목소리여서 에스티니앙은 저절로 어깨가 으쓱해졌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이상했다. 환하게 웃으며 ‘걸으니까 좋다!’ ‘고마워!’를 연발하는 친구를 똑바로 보기가 좀 그랬다.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실을 따라 기분이 들떴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와 눈을 마주치기 꺼려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실은 그런 태도를 칭찬을 받고 쑥스러워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뭘 이런 걸로 부끄러워하고 그래!”

에스티니앙은 그 뒤에 이어진 ‘너도 가만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다.’라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아실의 정확한 통찰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부끄러워한다고? 쟤 말마따나 ‘이런 걸로’? 호불호가 명확한 인간으로 살아왔던 만큼 그는 경계선 위의 감정 앞에서 취약했다. 예를 들면, 칭찬을 받은 건 좋은데 쑥스러워서 눈을 피하고 싶다는 그런 감정 말이다.

에스티니앙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일면과 줄다리기를 하는 사이, 아실은 해변을 한 바퀴 돌았다. 언제 벗었는지 손에는 샌들이 들려 있었고 종아리까지 바닷물에 젖은 채였다. ‘반바지를 입길 잘했어!’ 같은 소리를 하면서.

“이제 가야 하지 않나?”

묻는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뚝뚝 떨어졌다. 에스티니앙은 하늘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별을 보니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니었다.

“더 있고 싶으면 솔직하게 말해. 눈치 보지 말고.”

대꾸하면서 에스티니앙은 자신과의 줄다리기에서 이겼다. 아실과 평소처럼 주고받은 대화가 주효한 승리 요인이었다. 그는 내친김에 아실과 잡담을 나누며 나란히 걸었다.

“안 답답하냐? 다 낫고도 한참 갇혀있는데.”

“다들 내 걱정에 저러는 거니까…. 됐다고 할 때까지는 얌전히 말 들어야지, 뭐.”

“심심하면 말해. 또 업어줄 테니까.”

돌아올 때도 지붕을 뛰어다니지는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한 손으로 나무를 타는 묘기를 부리며 아실의 방 창문까지 올라갔다. 발코니를 딛자마자 아실은 등에서 내렸다. 당연히 침대까지 업고 갈 생각이었던 에스티니앙은 그게 좀 아쉬웠다…. 아쉬워? 뭐가? 하지만 그 감정에 대해 따져볼 틈은 없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실의 다리에 눈이 갔기 때문이다. 에스티니앙은 자연스럽게 방 안까지 따라 들어갔다. 그러곤 아실의 종아리에 묻은 모래와 소금기를 털어주었다.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나? 깨달은 것은 그의 두 발에 묻은 모래까지 훑어낸 뒤였다. 무릎을 꿇고서 한 손에 쥐기에는 빠듯한 발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현실감이 사라졌다. 그 탓에 발가락을 움츠리며 빠져나가는 발을 잡을 생각도 못 했다.

비어버린 손을 멍하니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곤란한 듯 웃는 아실이 보였다.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 고작 웃음 하나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니…. ‘내일 보자.’ 아실은 그렇게 말했다. ‘애들이 널 들여보내 주면 말이야.’ 농담을 덧붙이며 씩 웃는 모습에 에스티니앙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는 가슴 언저리를 문지르며 발코니를 훌쩍 벗어났다.

밤 산책을 두 번 더 다녀오고서 아실은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날 에스티니앙은 쿠루루에게 귀를 잡혀 ‘이 빚은 달아둘게.’라는 말을 들었다. 무슨 소리냐고 시미치를 뗐지만 통하지 않았다.

“당신들, 몰래 나갔다 왔지? 타타루가 방에 모래가 있다고 해서 말이야. 샬레이안 동쪽 해변에서나 나는 모래를 그 사람이 어떻게 묻히고 왔을까?”

‘지붕 뛰어다니는 것도 작작 하고!’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에스티니앙은 다시는 쿠루루를 얕보지 않기로 했다.

그날 이후로 아실과 창문을 넘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함께 외출했다가 늦기 전에 돌아오면 됐으니까. 둘 다 창문으로 나가버리면 방을 지킬 사람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아실은 올드 샬레이안의 만만한 건물들로 시작해서인지 다른 도시들의 여관 창문 앞에서는 난색을 했다. 에스티니앙은 그 점이 조금 아쉬웠지만 아실이 창문까지 배웅나와주는 것은 마음에 들었다. 너무 늦지 말라고 하면서 뺨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을 뿐이었는데도 들떠서 볼을 문지르다가 지붕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고백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실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자리를 뜨려고 했을 때는 급한 나머지 몸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실이 밤새도록 붙잡지 않았더라도 에스티니앙은 창문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주점에서의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손이 떨렸다. 발이라도 헛디디면 누구 손해겠는가? 남 좋은 일 하는 취미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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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 품에서 뭔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맨가슴을 지분지분 누르는 걸 보니 아실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의 정수리에 턱을 꾹 눌렀다. 들어올 때 창문 잠그라고 했지, 그런 말을 듣고서는 얼른 턱을 치웠다. 입 하나 뻥긋하지 않으면서 대답은 참 잘했다.

“잠그고 오기 전까지 나 안 일어나.”

에스티니앙은 반사적으로 그럼 좋지, 라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소리를 하면 아실은 제발 일어나 달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자신을 괴롭힐 게 뻔했다. 그는 옷을 주워입고 순순히 하루 늦게 문단속을 했다.

이불 위에서 까딱거리는 맨발을 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눈치챈 아실이 고개를 숙이라고 손짓했다. 귀를 잡힌 에스티니앙은 아침부터 낯부끄러운 음담패설을 들어야 했다. 그는 벌게진 얼굴로 귀를 문질렀다. ‘이거 아니야?’ 아실은 태연하게 웃었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저었다.

“처음 산책했을 때. 올드 샬레이안에서.”

아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맞네.’ 그는 반박을 기다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내 발 만졌을 때 네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알아?”

찔리는 게 수십 가지였던 에스티니앙은 말문이 막혔다. 그를 놀릴 말은 많았지만, 너무 몰아붙였다가 진짜로 화를 낼지도 몰랐다. 아실은 오늘은 뭘 할까, 따위의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대화를 따라오는 애인이 귀여웠다. 그걸 그때까지 몰랐다니 나도 참 안목이 없다니까. 그래도 에스티니앙은 제 것이었다. 그 사실이 만족스러워 아실은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