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곳은 언제나

-240526 작성

-6.5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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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창문을 열자마자 손가락이 뺨을 매섭게 꼬집었다. 에스티니앙은 속수무책으로 방 안까지 끌려갔다.
“말도 없이 가고!”
아실은 그렇게 책망했지만 에스티니앙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음식과 술은 먹을 만큼 먹었다. 태수가 부탁한 일도 기한이 끝난 데다 보이드로 뛰어든 목적도 달성했다. 이제는 태수궁에서 슬슬 방을 빼줘야 예의였다. 짐을 너무 늦게 가지러 갔다가는 담당자 부재니, 통금이니 하는 귀찮은 이유로 꼼짝없이 하룻밤을 더 묵었을 터였다. 애인의 숙소를 뻔히 알면서 다른 곳에 눕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실과는 곧 떨어질 예정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나?
이유를 설명했지만, 아실은 여전히 도끼눈을 뜬 채였다. ‘떨어져?’ 묻는 말투가 제법 사나웠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이 언짢아하는 이유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슬슬 때가 됐으니까. 하지만 너는 계속 라자한에 머무를 것 아닌가?’ 아실은 미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여기 남을 거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에스티니앙이 의아해할 차례였다.
“떠날 거냐? 어디로?”
이건 좀 곤란한데, 에스티니앙은 생각했다. 아실이 라자한에 머무른다면 언제든 찾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 길을 떠나면 얼굴 보기는 힘들어질 터였다. 당분간만이라도 같이 다닐까? 에스티니앙은 즉흥적으로 떠올린 새 계획이 마음에 들었다. 나쁘지 않겠지. 헤어질 때 아쉬움도 덜할 테고. 짧은 동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막 물어보려던 차였다. 아실은 약간 기막혀하는 투로 질문했다.
“내가 너랑 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에스티니앙은 한 박자 늦게 말뜻을 이해했다. 이해한 다음에는 그저 당황스러웠다. 그는 ‘뭐?’하고 되물은 뒤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아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단순히 몸만 나누는 사이라면 에스티니앙 같은 사람이 편했다. 오래 떨어져 있었더라도 어제 본 것처럼 구는 사람. 새삼스럽게 낯 가릴 필요도, 합의점을 다시 짚어볼 필요도 없는 사람. 하지만 모처럼 배도 맞고, 눈도 맞았는데 이렇게 굴면 곤란했다. 서로 독점하기로 약속해 놓고서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면 쓰나? 그동안 쫄쫄 굶는 내 아랫도리는 어쩌란 말이야?
물론 아실이라고 장거리 연애를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중 절반 조금 안 되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떠돌이였다.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규칙과 궤도가 있어서 생활을 공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실은 시시콜콜한 연락 없이도 연인이 단골 여관이나 집에 돌아올 시기를 예측할 수 있었다. 반면 에스티니앙은 그런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설령 그가 자기만의 궤도를 만든다 쳐도, 동선이 확립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동안 손가락이나 빨며 기다려 주기에는 아실의 인내심이 짧았다. 훨씬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데 길을 돌아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에스티니앙은 하던 대로 세상을 떠돌고, 몸 가벼운 자신은 그에게 매여 다니고.
“자기야, 용병들 사이에서도 이런 식으로 연애하면 뺨 맞아. 네가 경험이 없어서 봐주는 거야. 간다고 미리 말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빈 이불 끌어안고 울 뻔했네.”
아실은 애인을 가볍게 타박했다. 실제로는 울지도 않을 거면서 말은 청산유수였다. 그러고는 평소답지 않게 일찍 자자며 이불로 파고들었다.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결국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같이 가려고? 별것 아닌 문장이었는데도 말을 끝맺을 즈음에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아실은 애인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그가 품고 있을 법한 내심을 짐작해 보았다.
“부담스러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다. 잠깐 곁을 내주는 거라면 모를까, 누군가 그 자리에 계속 머무른다고 상상하려니 영 낯설었다. 그곳은 비어있는 게 당연했으니까. 사실 에스티니앙은 자기 곁에 빈자리가 있다는 것조차 잊고 지냈다. 스승이, 절친한 친구가, 사사건건 부딪치던 이단자와 동생뻘 되는 소년이, 신뢰하는 파트너가 잠깐씩 머무를 때나 의식했을 뿐이다. 떨어질 생각 없는 애인 앞에서 그는 영역을 침범당한 듯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불편한 속내를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입 밖에 냈다가는 긁어 부스럼이 날 소리였다. 에스티니앙도 필요할 때는 눈치를 챙겼다. 아실은 네가 무슨 생각인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러곤 타협안을 내놓았다.
“내기할래? 일주일 안에 네가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난 돌아온다는 쪽에 걸 거야. 네가 이기면 혼자 가도 돼. 난 라자한에서 기다리지, 뭐. 너 아니면 사실 떠날 이유도 없고. 대신 네가 지면 나랑 가는 거야.”
에스티니앙에게는 별로 득 되는 게 없는 내용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이유는 내기를 거절하면 빈 이불을 끌어안고 우는 쪽은 네가 될 거라는 협박 때문이었다. 다음날, 연락용 링크펄을 나눠 가진 뒤 에스티니앙은 떠났다.
그 후 며칠간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유령에 시달렸다. 따라오는 인기척이 없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며 뒤를 돌아보는 건 예삿일이었다.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나온 뒤에야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고, 숙소에 짐을 다 풀고 나서야 열쇠를 넘겨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기도 했다. 낯선 풍물을 보며 그는 종종 생각했다. 그 녀석이라면 이게 뭔지 알 텐데. 아실의 목소리와 향기, 슬쩍 기대 오는 체온과 무게는 마땅한 계기도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일쑤였다. 그러고 나면 비어버린 어깨 곁이 유독 허전하게 느껴졌다.
나흘째가 최대 고비였다. 그날따라 에스티니앙은 온 신경이 뒤통수로 쏠린 것 같았다. 초조함을 애써 무시하며 다음 거점으로 꾸역꾸역 걸음을 재촉한 것까지는 좋았다. 방을 잡고 곧장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내내 뒤척거렸다. 그는 결국 해도 뜨지 않은 새벽에 숙소를 나섰다. 그러곤 왔던 길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오기를 부린 만큼 손해가 컸다. 에스티니앙은 튼튼한 두 다리를 한계까지 혹사했고, 짐수레와 삯마차에 비상금을 낭비했다. 비공정 운행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으니까. 그러고도 때를 놓쳤다. 라자한에서 떠난 지 이레째 저녁의 일이었다. 새벽 일찍 도착하는 야간 비공정 표를 구할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그날따라 기상이 묘하게 나빴다. 에스티니앙은 비공정이 기상 악화를 사유로 회항하지 않기만을 기도하느라 한숨도 못 잤다.
다행히 비공정은 제시간에 도착했다. 에스티니앙은 뛰다시피 발착장을 빠져나왔다. 아실의 숙소로 가는 길이 마치 어제 지나간 것처럼 생생했다. 애인이 변덕을 부려 방을 옮기지 않았기를 빌면서, 에스티니앙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경로로 건물을 탔다. 비좁은 창턱에 아슬아슬하게 쪼그려 앉아서 아실의 방 창문을 밀었다. 제발 열려 있어라…. 창문은 희미한 끼익 소리와 함께 열렸다. 에스티니앙이 떠나기 전과 다름없이. 낡은 경첩의 소음이 오늘만큼 반가운 적이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조심스럽게 창틀을 넘었다. 창문을 제대로 걸어 잠근 뒤 새벽녘 박명에 의지해 침대로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귀에 잡혔다. 그는 침대 곁에 조용히 짐을 내려놓았다. 매트리스에 걸터앉아 손을 뻗었다. 방이 어두워서 시력만으로는 사람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에스티니앙은 손끝의 감각에 집중했다. 도톰한 코끝과 매끄러운 뺨이 느껴졌다. 뺨과 턱선, 곧은 목을 따라 훑어 내려갈수록 확신이 섰다. 아실이었다. 손안에 잡히는 몸이 워낙 익숙해서 옷을 들쳐 흉터를 만져볼 필요도 없었다. 아실이 성가시다는 듯 뒤척이는 바람에 에스티니앙은 얼른 손을 거두었다.
에스티니앙은 다리에 동여맨 각반을 풀다가 5분쯤 졸고, 윗옷을 벗다가 또 5분쯤 졸았다. 그는 간신히 탈의를 마치고서 아실 옆에 누웠다. 몸을 돌려 남의 허리에 팔을 두르는 폼이 자연스러웠다. 그건 지난 몇 달간 생겨난 버릇이기도 했고, 지난 며칠간 겪은 허전함을 물리치려는 행동이기도 했다. 하루 넘게 쌓인 피로가 수마가 되어 몰려왔다. 지척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숨소리와 품을 데우는 체온을 느끼며 에스티니앙은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자 침대에 혼자 남아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빈 옆자리를 보고 굳었다. 꿈이었나? 그는 방 안을 둘러보고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여긴 아실의 숙소가 맞았다. 에스티니앙은 제대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애인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잠결에 흔들어 깨우는 손길을 느끼고 좀 더 자겠다고 웅얼거리긴 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마른세수를 하며 일어나 앉았다. 아실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하느라 인기척이 가까워지는 것도 몰랐다.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왔냐, 하고 반응한 게 전부였다. ‘일어났어? 배 안 고파? 과일 사왔는데 좀 먹을래?’ 에스티니앙은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상대는 곧장 건성인 태도를 가볍게 타박했다. ‘무슨 생각 하길래 사람 말을 이렇게 흘려들어?’ 에스티니앙은 아직 잠기운이 묻어나는 투로 대꾸했다. ‘있어 봐, 네가 어디 갔는지 알아내야 할 것 아니냐….’ 그러자 등에 무게가 실리며 귓전에서 산뜻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여기 있는데?”
너울처럼 내려앉는 장미 향. 귀와 뺨에 간지럽게 스치는 머리카락. 광대뼈를 가볍게 누르는 입술…. 에스티니앙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코끝이 닿았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볼 수 있었던 건 아실의 눈뿐이었다. 산호가 자라는 사베네어 앞바다와 똑같은 청록색이었다. 날숨이 인중을 간질인 순간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틀어 입을 맞췄다. 물 흐르듯이 몸을 돌려 아실을 침대로 넘어트렸다. 그는 조급하게 파고들어서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이따금 새는 신음, 기분 좋은 당혹과 은근히 배어나는 정욕을. 애인의 입 안에서는 단맛이 났다. 요철이 맞물리듯이 빈자리를 채우는 존재감을 느끼며 에스티니앙은 직감했다. 이제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로 돌아오게 되리라. 아실 곁으로, 어디든 그가 머무르는 곳으로.
평소와 달리 키스는 키스로만 끝났다. 아실이 새벽에 급하게 돌아온 애인을 신나게 놀려댔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한을 넘겨서 왔으니 내기는 내가 진 것 아니겠느냐, 아무리 가벼운 약속이라도 약속은 천금같이 지켜야 하는 법이다, 설령 태수님이 오셔도 이건 못 무른다…. 그는 에스티니앙의 입에서 부탁이니 같이 떠나자는 말을 기어이 끄집어낸 뒤에야 흡족하게 웃었다. 애인 하나 골리자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집요하게 해대는 게 질이 나빴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마냥 불평할 수 없었다. 짓궂은 말을 한참 쏟아낸 끝에 사실 난 네가 안 올 줄 알았어, 속삭인 아실 탓이었다.
떠날 채비를 마치는 데에는 사흘쯤 걸렸다. 하루는 일주일 넘게 헤어졌던 동안 쌓인 회포를 푸는 데 썼고, 남은 이틀은 아실이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며 보냈다. 아실의 대외적인 소재지는 라자한으로 남았다. 시시각각 바뀌는 체류지를 일일이 알리는 건 아실에게도, 휴식 중인 동료들에게도 귀찮은 일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연락을 주겠다는 브리트라의 호의도 썩 믿음직스러웠고.
아실은 좋은 동행인이었다. 떠나 있었던 세월 탓에 현지 사정에 해박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에게 의지하면 숙박비를 바가지 쓰거나 맛없는 음식에 괜히 입맛을 버릴 일은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여전히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하는 쪽이 더 익숙했다. 그러나 파트너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것에도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다.
길을 떠난 뒤부터 여관은 각방을 썼다. 떼를 써서 따라왔는데 방까지 합치면 진짜 도망갈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아실의 매도에 에스티니앙은 누굴 그렇게 심약하게 보냐고 어이없어했지만 말이다. 아실은 짐짓 협박조로 물었다.
“그럼 합칠까?”
나란히 방을 잡고 숙박비도 이미 치른 뒤였다. 에스티니앙은 방을 바꾸기 번거로우니 오늘은 그대로 쓰자고 발을 뺐다.
사실 2인실을 쓰는 것에 큰 거부감은 없었다. 비용을 따진다면 방을 따로 잡는 것보다 같은 방에 묵는 쪽이 더 낫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아실만의 공간에 드나들 때 느껴지는 기묘한 정복감이 좋았다. 아실은 잠들기 전까지는 늘 방문을 열어두었다. 라자한에 머무를 때는 창문의 잠금쇠를 제대로 걸어둔 적이 없었다.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열린 통로였다. 이따금 그 사실을 의식하면 에스티니앙은 단전이 불덩이처럼 달궈지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고작 그런 일에 동하는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방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짐을 풀기 전에 했던 대화가 대화였으니만큼 먼저 찾아가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잠은 따로 자더라도 그전까지는 살을 붙이고 싶었다. 노크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머리카락과 귀를 주의 깊게 말리던 아실이 반겨주었다. 따뜻한 물에 막 목욕을 마친 탓인지 수건 사이로 드러난 뺨이 발그레했다.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문을 잠갔다. 그를 위해 열려 있는 방이었으니 문을 걸어 닫는 것 역시 그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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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풀어지면 어려운 질문도 선뜻 꺼낼 수 있게 됐다. 아실이 아직 혼자 다니고 싶으냐, 물어본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에스티니앙은 힘이 빠져 늘어진 아실과 맨다리를 뒤얽은 채 발장난을 치던 중이었다. 대답을 생각하느라 장난질이 저절로 멈췄다.
혼자가 편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이제는 아실과 같이 있는 것도 그만큼 익숙해졌다. 따로 다녀야 할 일이 생긴다면 모르겠지만, 아무 일도 없는데 굳이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좀 더 고민했다. 그 한마디에는 지금 생각하는 것이 다 담기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동안 아실은 발장난을 멈춘 애인에게서 차례를 넘겨받았다. 머리카락을 빗고 손가락에 가닥가닥 얽는가 하면, 배배 꼬았다가 한 움큼 쥐어 입을 맞추는 등 실컷 가지고 놀았다.
고심 끝에 에스티니앙은 그냥 괜찮다고 말했다. 복잡한 심사를 아실이 다 알 필요는 없었다. 그는 알고 싶어하겠지만, 에스티니앙은 속내를 정확히 설명하는 데에는 그다지 소질이 없었다.
문득 에스티니앙은 일이 생기면 연락하겠다던 브리트라의 말을 떠올렸다. 아실과 떨어지는 게 그제야 좀 걱정이었다. ‘혼자 어딜 가게 되면 말은 하고 가라.’ 그리로 돌아가야 하니까, 라는 뒷말은 내심으로 삼켰다. 아실은 너나 잘하라며 코웃음을 쳤다. ‘내가 너 말고 돌아갈 곳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에스티니앙은 놀란 눈으로 아실을 바라보았다.
아실은 시선을 느끼고 가만히 눈을 맞췄다. 뭐에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쪽을 보는 얼굴이 그냥 돌려보내기에는 제법 귀여웠다. 방문은 잘 잠그고 왔어? 묻자, 애인은 질문의 의도도 모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실은 입을 맞추느라 살짝 부어오른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자고 가.’ 에스티니앙은 잠시 고민하다 키스를 돌려주었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돌아갈 곳은 언제나 서로의 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