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일기: 산책

-240604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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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은 비 오는 날을 제외하면 산책을 빼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산책은 본격적인 나들이가 될 때도 있었고 고작 시장 한 바퀴를 둘러본 뒤 끝날 때도 있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늘 에스티니앙이 함께였다는 것이다. 뭐, 쉬는 날에는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까.
산책 시간대는 대체로 들쭉날쭉했다. 그리다니아에 살 때는 꼭 티타임 즈음에 길을 나섰기 때문에 에스티니앙은 여행용 다기 세트를 마련했다. 다소 충동적인 결정에 잔소리를 좀 했지만, 아실도 결국 숲에서 차 마시는 일을 무척 좋아하게 됐다. 나중에는 그가 에스티니앙보다 일체형 티팟과 찻잔을 능숙하게 다룰 정도였다. 아실이 예전에 원예가 자격증을 따 둔 덕분에 오후 숲에서의 티타임은 제법 입이 즐거운 시간으로 남아 있었다.
울다하와 림사 로민사, 라자한과 같은 도시들은 주로 저녁 풍경으로 기억되었다. 해가 진 뒤에 돌아다니려면 도시 안쪽밖에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구리칼날단과 관문 출입 용건의 경중을 다투고, 노란 셔츠에게 몸수색을 당하고, 별빛전사단에게 이미 다 외워버린 통금 시간 안내를 듣느니 다소 번잡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게 나았다.
각 도시의 저녁은 비슷하면서도 제각기 달랐다. 호객꾼의 외침과 취객의 시비가 오가는 울다하의 불야성, 주린 배를 붙들고 뛰어가는 선원들 탓에 늘 삐걱거리는 림사 로민사의 부둣가, 색유리 등불 아래에서 낮보다 더 휘황찬란한 라자한의 시장 거리…. 아실은 에스티니앙이 가본 적 없는 도시의 저녁에 대해서 말해줬다. 에스티니앙은 답례로 자신이 떠나온 곳의 풍경을 얘기해주려고 했지만, 성도의 저녁이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아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다음에 같이 보러 가자고 덧붙였다.
저녁 산책 도중에는 보통 군것질을 했다. 평소와 다르게 도시를 벗어나게 된 계기도 그것 때문이었다. 늘 들르던 가게에서 과일을 고르는데, 어느샌가 아실과 주인의 잡담 주제가 곤란한 처지에 놓인 지인 얘기로 바뀌어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귓등으로 대화를 흘린 탓에 데미르의 유열향까지 가야 한다는 말밖에 못 들었다. 아실은 흔쾌히 소일거리를 맡았다. 원래는 이렇게 급한 일은 안 받아준다고 생색도 냈다. 청과상은 넉살 좋게 맞장구를 치며 덤을 얹어주었다.
둘은 그 길로 청과상의 지인에게 자세한 의뢰 내용을 들었다. 편지와 서류를 전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만 밤중에 선뜻 도시 밖으로 나갈 사람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관문 폐쇄까지는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아실과 에스티니앙은 한달음에 숙소로 뛰어갔다. 간단하게 채비를 마친 뒤 진안문까지 힘껏 달렸다. 덕분에 유열향까지 타고 갈 초코보를 간신히 빌릴 수 있었다.
연금술사들은 뜻밖의 손님에게도 친절했다. 의뢰인이 맡긴 것을 넘겨주고서 조금 기다리자, 누군가 청소가 끝났다며 그들을 안내해 주었다. 최근에는 닫아 두고 있었다는 공용 침실이었다. 깨끗한 침구에서 풍기는 좀약과 방향제 냄새가 방 자체에서 나는 먼지 냄새와 뒤섞여 느낌이 묘했다. 급하게 치운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우리뿐이라서 편하다.’ 아실은 그렇게 말했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식으로 챙겨온 과일은 금세 바닥났다. 방을 안내해 준 연금술사에게 보답으로 몇 알, 시설을 둘러보다 만난 사람들에게 몇 알, 하는 식으로 나눠준 탓이었다. 아실은 끈적거리는 손가락을 핥다가 아예 씻어야겠다며 방을 나섰다. 에스티니앙도 따라갔다.
둘은 인접한 해변에서 손을 씻은 뒤 밤 산책에 나섰다. 모처럼 도시를 벗어난 김에 바닷가를 걷고 싶다며 아실이 앞장섰기 때문이다. 달이 훤해서 굳이 등불을 들고 갈 필요는 없었다. 파도가 적시고 간 모래톱이 달빛에 빛나는 광경은 어딘지 익숙했다. 모래나 눈이나, 고운 것들은 다 비슷하게 반짝거리는 모양이라고 에스티니앙은 생각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맨발로 밟을 수 있느냐, 없느냐 정도였다. 아실은 밀려오는 파도를 요령 좋게 피하다가 아예 신발을 벗었다. 에스티니앙은 마른 땅을 디디며 따라갔다. 발이 젖는 게 꺼려졌다. 결국에는 그도 한 손에 신발을 들고 바다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발목이 잠길 만큼 밀려온 파도가 발등을 핥으며 물러났다. 생소한 감각이었다. 아실과 함께하는 일은 대개 이러했다. 온갖 처음이 그와 함께 찾아왔다. 바닷물에 뛰어들지 말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에스티니앙이었지만, 다정하게 감겨드는 손은 그를 파도 속으로 은근히 이끌었다. 결과가 나빴던 적이 없었으므로 에스티니앙은 종용하는 것을 알면서도 따라가고는 했다. 지금처럼.
에스티니앙은 파도와 모래에 잠겼다가 드러나는 아실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모래가 묻어서인지 물에 젖어서인지 발뒤꿈치가 옅게 반짝거렸다. 얕게 패인 발자국이 쉴 새 없이 파도에 쓸려나갔다. 에스티니앙은 그 광경이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조급하게 아실이 밟은 자리를 그대로 밟아 나갔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중간에 깨닫긴 했지만, 이상한 오기가 생겨 계속했다.
둘은 해변을 실컷 걸었다. 시원한 건 좋은데 모래가 묻는 건 싫다는 말을 에스티니앙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아실은 아실대로 업어주겠다는 제안을 사양하지 않았다. 덕분에 돌아오는 길이 편했다. 애인의 등 위에서 유열향까지 남은 거리를 재다가, 아실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모래에 새겨진 자취를 지우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모래톱은 이미 매끈하게 젖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지나온 흔적이 희미하게 눈에 띄었다. 두 사람 분의 무게가 실린 발자국은 그만큼 깊었다. 파도가 몇 번이나 모래를 골라야 할 정도로.
에테라이트 주변을 둘러싼 부두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아실이 발을 씻을 방법을 고민하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훨씬 간단한 해결책을 찾았다. 그는 해변에 쌓인 상자 더미에 애인을 앉혔다. 그러고는 윗옷을 벗어 아실의 발을 감쌌다. 대뜸 쪼그려 앉아 종아리를 잡는 바람에 말릴 틈도 없었다.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유열향에서 내준 방까지는 흙길을 올라가야 했다. 이대로 신발을 신으면 안감으로 댄 가죽이 상할 터였다. 그에 비하면 윗옷이 젖는 건 감수할 만했다. 에스티니앙은 모래가 묻은 종아리부터 말라 가는 발끝까지 주의 깊게 훑었다. 태도가 제법 진지했던 탓에 아실은 애인을 그냥 놔뒀다. 벗은 등과 팔근육의 굴곡을 따라 달빛이 흘러내리는 게 보기 좋았다.
아실의 발을 말끔히 훑어낸 에스티니앙은 본인 발도 알뜰하게 닦았다. 주섬주섬 일어나 신발을 꿰어 신고 윗옷을 힘껏 털었다. ‘슬슬 자러 갈까.’ 아실은 바지만 입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좀 파렴치하지 않은가 싶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일어난 욕망은 고이 접어두기로 했다. 문밖에 사람이 수시로 지나가는 공용 침실은 일을 치르기에 좋은 곳이 아니었다. 가볍게 들러붙고서 끝낸다면 괜찮겠지만 경험상 그럴 수는 없을 터였다. 아실은 애인을 도발하는 대신 내일 밤도 맑으면 좋겠다고 했다. 달은 한동안 꽉 차 있을 것이다. 창을 활짝 열어놓고 그 아래 에스티니앙을 벗겨서 놔두면 보기 좋으리라.
둘은 모처럼 일찍 잠들었다. 다음날은 아실이 바란 대로 밤이 깊을 때까지 구름 한 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