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일기: 스케이트

-240608 작성

-주의: 용기사단 관련 설정, 커르다스 주위 지리 정보 날조

-소재 제공: 용치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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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니앙은 침실 커튼을 걷었다. 창문을 문틀째로 흔들던 바람이 오늘따라 잠잠했기 때문이다. 하늘을 보니 구름도 거의 끼지 않은 듯했다. 막 동이 튼 직후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오늘 하루는 평소보다 날씨가 괜찮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추위 타는 애인을 데리고 놀러 가기 좋은 날이었다. 그는 서둘러 옷을 갈아입었다. 외출 준비를 하려면 아침 운동을 빨리 해치워야 했다.
운동을 마친 뒤에는 집 뒤꼍에 딸린 창고를 뒤졌다. 성도로 이사한 뒤 에스티니앙은 보렐 저택에 맡겼던 잡동사니를 모두 회수했다. 버리기는 아깝고 자주 쓸 일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물건들은 그대로 창고에 처박혔다. 아실이 손을 댄 것인지 어느 정도 정리는 되어 있었다. 분류 기준을 알지 못했으므로 눈에 띄는 곳부터 뒤적거려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에스티니앙은 다행히 찾던 것을 금세 손에 넣었다. 신전기사단 시절에 쓰던 스케이트 날이었다.
7재해 이전에도 커르다스의 겨울은 혹독했다. 얕은 강과 개울은 쉽게 얼어붙었다. 스케이팅이 대중적인 겨울 스포츠로 자리매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신전기사단이 스케이트 날을 보급품으로 돌린 건 장병들의 여가 생활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순찰이나 행군 도중 빙판을 만나도 재빨리 이동할 수단이 필요해서였다. 꾸물거리다가는 정찰 나온 용에게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기사들은 겨울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군용 스케이트 날로 얼음을 지치러 다녔다. 민간에서 주로 쓰는 나무 스케이트 날보다 보급품으로 받은 철제 스케이트 날이 더 빠르고 신났기 때문이다.
에스티니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술 내기 스케이팅 경주에서 늘 이겼다. 마시지도 않을 술에 돈을 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처음에는 아이메리크에게 끌려갔지만, 나중에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 알아서 끼어들었다. 술을 안 마신다고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은 없었다. 기사들 중에는 에스티니앙처럼 승부만 즐기는 속도광이 더러 있었다. 술 내기가 중요한 치들은 실력자를 서로 자기편에 끌어들이려고 온갖 꼼수를 썼다. 돌이켜보면 에스티니앙은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좋아했다. 빙판 위의 경주가 얼마나 즐거웠는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실과도 그런 식으로 겨뤄보고 싶었다. 기왕 성도에 살게 됐으니 스케이트 타는 법 정도는 알아둬야지,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스케이트 날은 두 쌍이나 있었다. 예비용으로 지급된 물건까지 알뜰하게 빼돌린 결과였다. 날이 녹슬거나 발판이 썩거나, 혹은 고정끈이 삭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까지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앉은자리에서 스케이트 날을 깨끗하게 닦았다. 다음으로는 애인을 깨우러 갔다. 이불에 파묻힌 아실을 흔들자 불만스러운 투정이 흘러나왔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귀에다 외출 계획을 속삭였다. 귀 밝은 애인은 그제야 꿈적거리며 일어났다.
늦은 아침 식사를 끝내고 도시락을 챙겼더니 어느새 정오 근처였다. 아실은 이제 남의 간섭 없이도 춥지 않게 껴입는 법을 알았다. 에스티니앙은 몸을 움직일 테니 조금 얇게 입어도 되겠다 싶었지만, 땀이 식으면 더 추워질 거라는 아실의 반박도 일리는 있었다. 나들이 장소는 성도 인근의 얼어붙은 강이었다. 신전기사단 소속이었을 때 늘 가던 곳이었다. 에스티니앙은 길을 나선 직후에야 내기하러 온 기사들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인제 와서 다른 빙상장을 찾을 여유가 없었으므로 걸음을 재촉했다.
강가는 텅 비어있었다. 도시락이 얼지 않도록 불을 피운 뒤 스케이트 탈 준비를 했다. 손가락보다 가느다란 날이 달린 발판에 신발 밑창을 맞추고, 발판에 달린 가죽끈을 조여 신발에 단단히 동여맸다. 에스티니앙의 발에 얼추 맞춘 물건이라 아실에게는 발뒤꿈치 쪽이 조금 남았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에게 혼자 일어서 보라고 말한 뒤 가볍게 빙판을 지쳤다. 얼음이 약한 곳을 살펴볼 겸 몸을 풀어둘 생각이었다. 그도 스케이트를 타는 건 오랜만이었다. 용기사단으로 적을 옮긴 뒤부터는 빙상에 나올 여유가 없었다. 소속이 갈렸으니 옛 동료 무리에 끼어들기는 머쓱했고, 용기사단은 서로 간의 친목을 크게 다지려고 들지 않았다. 일주일 전에 농담을 주고받던 동료가 오늘은 관에 눕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탓이다. 죽음을 기리기에는 시절이 나빴다.
다행히 에스티니앙의 팔다리는 스케이트 타는 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속도를 좀 냈다가, 방향을 급하게 바꾸고 여러 번 꼬았다가, 뒤로 탔다가 갑자기 멈췄다가…. 이만하면 초보자를 건사하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강가로 돌아왔더니 마침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자기야, 나 넘어지겠어!’ 아실은 얼음 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다리가 갓 태어난 새끼 양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보이는 것과 달리 균형을 제법 잘 잡고 있어서 넘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당사자는 난생처음 경험하는 일에 그답지 않게 겁을 먹은 모양이었지만.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잡아줄 것처럼 다가가다가 두세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멈췄다. 여기까지 와보라는 말에 애인은 있는 힘껏 인상을 썼다.
아실은 얼음 위에서도 잘 걸었다. 문제는, 걸을 줄만 알았다. 그는 조금이라도 미끄러질 낌새가 보이면 대번에 에스티니앙의 팔뚝을 꽉 쥐었다. 약간 떨어져서 끌어주려고 해도 금세 품에 안기는 바람에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걸음마 연습만 했는데 땀이 죽죽 났다. 그래도 에스티니앙은 즐거웠다. 뭐든 능숙하던 애인이 서툴게 구는 모습에서 그는 묘한 만족스러움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약간 아쉬웠다. 아실이 금방 배울 줄 알고 내심 경주를 기대했는데, 정작 그는 혼자 서기만 해도 다행인 수준이었다. 애인과 호들갑을 떨며 부둥켜안고 노는 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집에 가기 전에는 조금이라도 혼자 탈 수 있게 만들어야지 싶었다. 마침 그들은 짐을 부려놓은 강변과 제법 멀어진 터였다. 저기 보이나, 묻자 아실은 에스티니앙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슬슬 출출한데 뭣 좀 먹고 마저 놀자고.’ 에스티니앙은 이쯤에서 강기슭까지 혼자 가보라고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실은 ‘그럴까?’ 대답하고선 훌쩍 품에서 빠져나갔다. 애인이 능숙하게 얼음을 지치며 저만치 앞서가는 광경에 에스티니앙은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이라며?”
불을 피우며 추궁했더니 아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몸 풀 동안 나는 뭘 했겠니? 한 번 균형 잡아보니까 쉽더라.’ 그만하면 다 배운지 한참인데 왜 어설픈 척했느냐, 묻자 돌아온 대답이 이랬다. ‘추워서 수작 좀 부려봤어.’ 농담이 고약했지만 진담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상대는 아실이었다.
“진지하게 해. 나만 바보 된 기분이니까.”
투덜거렸더니 재깍 미안하다는 사과가 돌아왔다. 자기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는데 안고 있는 게 좋았다나. 좋았다는데 더 나무랄 수도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불평을 관뒀다.
둘은 가볍게 요기를 끝내고 다시 스케이트 날을 신었다. 아실은 언제 애인에게 매달려 꾸물거렸냐는 듯 펄펄 날아다녔다. 에스티니앙이 가르쳐줄 만한 건 한창 빠르게 미끄러지는 중에 급하게 멈추는 요령 정도였다. 아실이 워낙 겁 없이 굴어서 이것마저도 금방 배웠다.
에스티니앙이 바랐던 스케이팅 경주는 결국 불발됐다. 아실은 과하게 속도 내는 걸 꺼렸다. 스케이트 발판이 신발보다 약간 커서 미묘하게 불편하다는 게 이유였다. 에스티니앙은 수긍했다. 그 역시 장비 불량 탓에 일어난 참사를 여럿 봐 왔으니까. 경주만 하지 않았을 뿐 그들은 쉴 새 없이 얼음을 지쳤다. 에스티니앙은 뒤로 타 보겠다는 아실을 봐줄 요량으로 손을 잡고 끌려가기도 했고, 애인과 시시한 잡담을 나누며 빙판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그게 다였지만, 의외로 재미있었다.
도착했을 때만 해도 발밑에 붙어 있었던 그림자가 꽤 길어졌다. 아실의 뺨은 체온이 지나치게 올라 발그레했다. 슬슬 돌아가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성싶었다. 둘은 각자 한 손에 스케이트 날을 달랑거리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귀갓길에 에스티니앙은 함부로 얼음 위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빙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얼음이 얇은 곳을 구분하기 어려워했다. 온 커르다스가 꽁꽁 얼어붙은 뒤에도 얼음물에 빠지는 사고는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아실은 다음에 스케이트를 타러 가거든 그것도 알려달라고 했다. 에스티니앙은 그러마, 대꾸했다. 아실에게 가르쳐줄 만한 게 아직 남았다는 사실이 내심 흡족했다.
다음날부터 며칠간 에스티니앙은 제화공의 작업실이며 대장간을 들락거렸다. 스케이트 발판을 아실의 신발 크기에 맞는 것으로 바꾸고, 겸사겸사 자기 것도 발판 고정용 가죽끈을 새로 갈았다. 언제든 날씨가 좋아지면 스케이트를 타러 나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