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을 위한 부적

-240918 작성

-〈돌아갈 곳은 언제나〉이후의 이야기

-주의: 6.55 이후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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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뢰 도중 시간이 뜨거나 여관에서 일을 쉴 때면 아실은 이런저런 소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탓에 아실의 가방 밑바닥에는 무슨 일에 쓰는지 모를 잡동사니가 항상 굴러다녔다. 최근에는 색색의 실과 가죽끈 뭉치였다. 에스티니앙이 뭘 만드는 거냐고 물어봤지만 아실은 속 시원히 대답해 주지 않았다. 다 만들면 말해주겠다는 걸로 봐서는 더 캐물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는 애인의 소일거리를 종종 구경했다. 길쭉한 손가락이 실을 휘감고, 가죽끈을 한데 단단히 꼬고, 라자한 풍의 장식 매듭(아실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고 물었지만 에스티니앙은 자신의 눈썰미를 믿었다)을 짓는 광경은 제법 흥미로운 구경거리였다. 하지만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깔끔하게 매듭지은 팔찌를 채워주기 전까지 장식끈의 용도를 짐작도 못 했다. 어쩐지 손목 둘레를 자꾸 재보더라니.
“라자한 전통 부적이야. 신연의 끈이라는 건데….”
인간과 신을 잇고, 나쁜 운명을 물리칠 가호를 내려주고…. 아실이 부적의 의미를 설명하는 동안 에스티니앙은 손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팔찌를 살폈다.
“만들어줘야겠다고 계속 생각은 했는데, 바빠서 영 손댈 틈이 안 나지 뭐야. 이런 건 어떤 마음으로 만드는지도 중요하니까.”
“신을 믿는 줄은 몰랐다만.”
“안 믿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부적을 엮는 소일거리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실은 소재지 불명인 혈맹원에게 줄 것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유독 팔찌를 받을 상대와 관련된 잡담이 많았다. 산크레드와는 이런 일이 있었고, 야슈톨라와는 저런 일이 있었고…. 손이 입만큼 부지런하지 않았다면 부적을 완성하기도 전에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졌을 터였다. 에스티니앙은 어쩌다 보니 옆에서 말동무를 해주고 있었다. 위리앙제에게 줄 팔찌를 만들기 시작했을 즈음, ‘원래 이렇게 잡담을 하나?’ 물었더니 아실은 어깨를 으쓱였다.
“소리내서 말하면 힘이 실리잖아. 정성을 쏟는 거야.”
“내 걸 만들 때는 조용했으면서.”
“본인 앞에서 말하면 소용이 없거든.”
에스티니앙은 이건 또 어디의 미신인지 물어보려다 관뒀다. 믿지도 않는데 알아봤자 무슨 쓸모가 있겠나 싶었다. 대신 꼬투리를 잡은 김에 가볍게 놀렸다.
“그럼 이건 정성이 덜 들어갔나 보군.”
아실은 코웃음쳤다.
“걱정 마! 그게 제일 효과 좋을걸? 만드는 내내 네 생각만 했거든. 바로 옆에 있으니까 어렵지도 않더라.”
아실은 일부러 눈을 맞췄다. 에스티니앙은 머쓱해진 나머지 시선을 피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었다. 마침 아실의 손목이 눈에 들어와서 그대로 화제를 돌렸다.
“네 것은?”
“없는데?”
아실은 말을 이었다. “이건 다른 사람한테 만들어주는 거라서 의미가 있는 거야. 자기 자신의 평화와 안전을 기원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나는 내가 챙길 수 있으니까, 그 애들부터 만들어주는 게 순서겠지.”
에스티니앙은 뜬금없이 몇 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아주다야 귀환 기념 연회가 열렸던 날, 아실은 이렇게 물었다. ‘내가 너랑 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건 곧 이런 뜻이었다. ‘나한테 같이 가자고 말하지 그랬어?’ 그러고는 내기를 하자 들쑤셔서 기어이 에스티니앙을 돌아오게 했다. 지금까지 있는지도 몰랐던 빈자리를 의식하게 했다. 그런 주제에 자기는 혼자 반듯하게 서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빈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돌연 부아가 치밀었다.
이해할 수는 있었다. 동료들을 언제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으니, 그들 몫의 선물을 먼저 준비하는 게 타당했다. 아실은 미신을 진지하게 믿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에스티니앙은 불쾌했다. 왜냐하면, 아실이 자기한테는 부적을 만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듯 말했으니까. 없긴 왜 없어?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만들어 달라고 하지, 그깟 부적…. 일련의 불만이 머릿속을 주르르 스쳤다. 에스티니앙은 그제야 깨달았다. 내기를 걸었던 날 아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상대가 의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깔끄럽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했다.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등을 떠밀었다. 에스티니앙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거, 만들기 어려운가?”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놀리려 들 것을 각오하고 고개를 들었다. 눈치 빠른 애인에게는 에둘러 말하나, 직설적으로 말하나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아실은 에스티니앙을 놀리는 대신 그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그러곤 가방을 뒤적거린 뒤에 재료가 모자라겠다고 했다. 둘은 부적 재료를 구하기 위해 라자한 쪽으로 길을 틀었다.
아실은 라자한으로 돌아가는 틈틈이 부적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 첫 번째 결과물은 볼품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섬세한 손놀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손가락을 직접 얽어가며 매듭짓는 법을 알려주던 스승이 묘한 손장난만 치지 않았더라면 더 괜찮게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실은 하필 그걸 수업료로 가져갔다. 내놓으라고 했더니 모양새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에스티니앙은 두 번째로 만든 팔찌까지 아실의 손목에 걸어줘야 했다. 명색이 부적인데 만듦새가 허접한 걸 줘놓고 나 몰라라 할 순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만들어봤다고 처음보다는 모양새가 봐줄 만했다.
때마침 아실은 알리제에게 줄 부적을 만들던 중이었다. 두 번째 팔찌를 손목에 차고 이리저리 돌려보던 그는 ‘알피노 것은 네가 만들어주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둘은 얼마간 머리를 맞대고 쌍둥이 몫의 부적을 만들었다. 팔찌의 매듭을 거의 다 지었을 즈음에는 묵던 여관으로 바르샨이 찾아왔다. 발데시온 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는 말을 듣자마자 둘은 눈을 마주쳤다. 에스티니앙은 어쩐지 오래 떨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동안 헤어진 자리에서 얌전히 기다리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실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아실은 준비할 시간을 이틀만 달라고 했다. ‘그쪽에서 급하다고 하면 나도 내 일이 있다고 전해. 장거리 텔레포를 할 때는 원래 앞뒤로 하루 쉬는 게 기본이야.’ 아실이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에스티니앙도 채비를 했다. 알피노에게 줄 부적을 마무리했고 남은 시간 동안 부지런히 붙어먹었다. 떠나기로 한 날 아실의 얼굴에는 드물게도 피로가 서려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연애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애인을 너무 괴롭혔나, 싶어 양심이 따끔거렸다.
“피곤한 건 난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이야?”
에스티니앙의 양심 고백을 듣고서 아실은 시원하게 웃었다.
“괜찮아! 문제 될 것 같으면 진작 싫다고 했지. 원래 자고 있을 시간이라 이런 거야. 딱 한 시간만 미뤘으면 좋겠는데…. 약속은 약속이니.”
아실은 체력 소모를 줄이기 위해 에테르 결절점에서 텔레포를 타기로 했다. 에스티니앙은 애인을 배웅한 뒤 바로 출발할 작정으로 묵던 방을 정리했다. 둘은 숙박비를 나눠 내고서 에테라이트 광장까지 함께 걸었다. 아실은 가는 동안엔 말이 없다가 광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이런저런 당부를 했다. 평소답지 않게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이를 알아채고 슬쩍 웃었다. 제대로 헤어질 때는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표정을 짓는구나 싶었다. 한편으로는 누군가 자신을 일일이 걱정한다는 사실이 생소했다. 그는 괜히 입가를 문질렀다.
“자기야, 내가 뭐랬지?”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당부를 기억나는 대로 읊었다. 애인은 하여간 말은 잘한다고 투덜거리며 대뜸 목에 팔을 감았다. 에스티니앙은 눈치 빠르게 고개를 숙여주었다. 아실은 그 잠깐도 길다는 듯 까치발을 하며 입을 맞췄다. 불안정해진 자세 탓에 에스티니앙의 목에도 무게가 실렸다. 에스티니앙은 얼른 아실의 허리를 감아 몸을 지탱했다. 그의 혀가 입안 깊숙이 밀고 들어가자 바짝 들린 아실의 발뒤꿈치도 서서히 땅에 닿았다. 서로의 숨을 조급하게 삼킨 끝에 입술이 떨어졌다.
입맞춤이 끝났는데도 아실은 애인의 목에 계속 팔을 감고 있었다. 뺨과 턱 곳곳에 입술이 아쉽게 찍혔다. 에스티니앙은 이러다간 잠을 줄인 보람도 없이 지각하겠다, 싶었다. ‘늦겠다, 얼른 가.’ 그러곤 잠시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잘 다녀오고.’ 라자한에 머무를 생각도 없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지만, 애인은 그 점을 지적하는 대신 픽 웃었다. 목을 감은 팔이 스르르 풀렸다. 그 순간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손목에 나란히 감긴 팔찌를 발견했다. 처음엔 모양도 이상한 걸 굳이 가져간다 싶었는데 지금은 부적이 두 개나 있으니 든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다녀올게!’ 텔레포 마법의 빛이 솟구친 순간, 아실은 떠났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떠난 자리를 내려다보며 어디로 갈지 고민했다. 생각 없이 지맥을 탔다가는 애인을 따라 북해로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목적지를 확실히 정해야 했다. 가장 먼저 생각이 가 닿은 곳은 림사 로민사였다. 알데나드 소대륙에서 이 도시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무역항으로 여겨졌다. 산간벽지에서 평생을 보낸 에스티니앙에게도 림사 로민사는 그런 장소였다. 그는 목적지의 지명과 풍경을 되뇌며 지맥으로 녹아들었다.
한 번에 먼 거리를 오가다 보면 시차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림사 로민사에 도착한 에스티니앙은 그림자를 보고 라노시아가 아직 오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북해는 아침쯤 되었을 것이다. 올드 샬레이안은 림사 로민사보다 서쪽에 있었으니까. 아실을 그렇게 급하게 보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에스티니앙은 뒤늦게 아쉬워졌다.
모험가 길드와 항구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다 보니 출출해졌다. 적당히 든든한 길거리 음식을 사 먹던 중에 링크펄이 울리는 바람에 에스티니앙은 연락을 곧장 받지 못했다. 입에 든 것을 급하게 삼키며 링크펄을 건드리자, 약간은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헤어진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아실은 궁금한 게 무척 많았다. 에스티니앙은 질문 세례가 끝난 뒤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어볼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아실은 의뢰가 생겼다고 했다. 투랄 대륙까지 가야 하는 만큼 짧게 끝나는 일도 아니라서 당장은 못 돌아가겠다는 거였다. ‘붙잡은 건 난데 정작 내가 떠나게 됐네. 미안해서 어쩌지?’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가 통화 중이란 것을 깨닫고 뒤늦게 대꾸했다. ‘떠났으니 돌아올 일만 남았군.’ 그는 알피노에게 만들어준 부적으로 화제를 돌렸다.
통화가 끝난 뒤 에스티니앙은 여객 운송 조합 사무실로 찾아가 투랄 대륙에 관해 물어보았다. 멀기는 정말 멀었다.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는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을 바다 위에서 보내게 될 줄 몰랐다. 배편을 물어보니 마침 오늘 출항하는 배가 있었다. 출항 시각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으므로 그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건량을 샀다. 돈은 현지에서 벌어도 됐다. 어차피 화폐도 다를 테니까.
서쪽이라, 재미있는 우연도 다 있었다. 동쪽, 북쪽은 다 가봤고…. 그럼 다음엔 서쪽이겠지. 여객선 선착장으로 가던 에스티니앙은 문득 소매를 걷어보았다. 아실이 만들어준 팔찌가 손목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복잡한 매듭을 보고 있으려니 애인이 실과 가죽을 엮을 때 어떤 얼굴이었는지 저절로 떠올랐다. 그에게는 부적이 하나뿐이었지만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소매를 원래대로 내린 에스티니앙은 옷 위로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