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

-250101 작성

-Wellcom Farewell 드림 연말 합작 참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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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과의 연락 전용으로 개설해 둔 링크펄이 요란하게 울렸다. 정작 그 너머에서 들려온 건 알베리크의 목소리였다. 성도로 이사 온 뒤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실은 의아해하며 용건을 물었다. 에스티니앙이 뻗어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가 시끌벅적한 소음과 뒤섞여 들렸다.
“그래요? 에스티니앙이?”
단둘이 마실 때는 대체로 애인의 주량에 맞췄다. 에스티니앙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마신 적이 없었다. 최소한 방까지는 자기 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아실도 알아서 자제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는 취미는 없었고. 하지만 에스티니앙의 스승과 은퇴한 기사들, 옛 용기사단 단원들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 녀석이 오늘따라 답지 않게 분위기를 탔다거나….
전쟁이 끝난 뒤부터 용기사단 출신 기사들은 매년 연말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퇴직 시기와는 상관없이 용기사단에 몸담은 적이 있다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자리였다. 느슨한 조건에 비해 참석 인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사람이 가장 많이 왔을 때도 기존 용기사단 정원의 절반을 채울까 말까 하는 수준이었고 정기적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람은 훨씬 적었다. 처음 모임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에스티니앙은 그 녀석들 얼굴을 봐서 뭐 하느냔 태도였지만, 알베리크의 끈질긴 설득 끝에 딱 한 번뿐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실은 잠시 애인의 일일 보호자를 나무랄까 싶었지만, 알베리크도 제법 술을 들이부은 목소리여서 관뒀다. 취한 사람을 타박해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그는 동거인을 데려오기 위해 집을 나섰다.
잊힌 기사 주점은 연말답게 만석이었다. 아실은 시끄러운 홀에 들어서며 알베리크의 목소리를 찾아 귀를 쫑긋거렸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다가가서 아는 체를 하자 술이 불콰하게 오른 알베리크가 반색하며 자리를 내주었다. 아실은 겹겹이 껴입어 둔해진 걸음으로 구석 자리에 간신히 끼어들었다. 에스티니앙은 들은 대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아실은 애인을 몇 번 흔들어보았다. 에스티니앙은 단단히 취했는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정신을 차릴 때까지 얼마쯤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실은 얼굴을 싸맨 목도리를 풀고 외투를 벗었다. 테이블마다 미어터지는 사람들의 체온과 주점에서 땐 불기운 탓에 실내는 조금 더웠다. 그러고 나서야 아실은 전직 용기사들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사실 아실은 알베리크와 인사를 주고받을 때부터 주목받고 있었다. 연말 술 모임에 나올 만한 얼굴들은 이미 죄다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티니앙은 올해 첫 출석이었지만 워낙 유명인이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지각생의 머리 위로 쫑긋 솟은 두 귀를 본 순간 테이블의 절반 정도는 ‘혹시?’라고 생각했다. 에스티니앙과 기수가 가까운 전직 용기사들은 대부분 아실의 얼굴이나 인상착의를 알았다. ‘그 단장’이 ‘애인과 함께’ 성도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들 얼마나 놀랐던가? 단장의 애인이 알고 보니 성도의 영웅이었다는 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았다. 용기사들 사이에서 마지막 푸른 용기사가 가지는 위상은 그런 것이었다. 성도의 영웅과 맞먹을 만큼 드높고 때로는 구국의 전사라는 명성마저도 압도하는 것.
아실은 이런 내막을 알지는 못했지만, 좌중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여태껏 받았던 것과 종류가 다르다는 정도는 눈치챘다. 신선하네, 애인 때문에 주목을 다 받고…. 썩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여긴 이슈가르드니까 어쩔 수 없지. 아실은 넉살 좋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이이가 취했대서 데리러 왔는데 영 일어나질 못하네요.’ 등을 토닥거리는 손짓과 애정 어린 말투에 아실이 누군지 모르던 사람들도 에스티니앙의 동거인이라는 사실은 얼추 눈치를 챘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아실은 애인이 무슨 사연으로 이렇게 뻗었는지 캐냈다. 테이블 여기저기서 대답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별로 먹이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됐다, 단장이 매번 술 모임에 빠진 건 술이 약해서인가보다, 저쪽이 너무 일찍 골로 가서 영 싱거운데 당신이 대신 마시지 않겠냐…. 취한 사람들답게 맥락이 중구난방이었다. 아실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대꾸하고, 넘겨야겠다 싶은 말은 웃음으로 받았다.
에스티니앙은 술잔에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대고 엎드린 채였다. 잘못 뒤척거렸다가는 술로 머리를 감을 지도 몰랐다. 아실은 얼른 잔을 치웠다. 그러다 코끝에 스친 주향이 괜찮아서 몇 모금 홀짝거렸다. 에스티니앙 몫으로 따른 거였으니 자신이 마셔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반 넘게 남은 잔을 봤을 때는 고작 이거 마시고 뻗었나, 싶었는데 막상 입에 대 봤더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술은 에스티니앙이 평소 마시던 것보다 훨씬 도수가 셌다. 탐색전을 마친 아실은 순식간에 잔을 비웠다. 에스티니앙이 쥐고 있던 포크를 가져가 어울리는 안주도 찍어 먹었다. 건너편에 앉은 알베리크는 묘하게 뿌듯해했다. 술을 가득 따라주면서 다른 안주도 먹어보라며 접시를 밀어주기까지 했다. 아실은 사양하지 않았다. 술맛이 좋다고 추켜세우며 물어봤더니 지역 전통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실은 애인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술을 날름날름 해치웠다. 그러다 옆에 앉은 사람과도 잔을 부딪치고, 자작을 하면 재수가 없다는 알베리크 연배의 퇴역 기사에게도 잔을 받고, 자리에 앉은 사람들에게도 술을 한 잔씩 돌렸다. 잘 마시는 사람이 끼어든 탓에 몇 병씩 꺼내놨던 술이 금방 바닥났다. 술을 더 시키자 지브리옹은 눈을 가득 채운 양동이에 술병을 몇 개나 꽂아서 가져왔다. 양동이가 테이블 중앙에 올라왔을 때 아실은 생소한 광경이 주는 박력에 놀라 입만 동그랗게 벌렸다. 이내 새 술에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동조해 같이 환성을 지르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는 애인을 데리러 왔다는 것도 잊고 밤이 깊도록 사람들과 어울렸다.
자정이 다가올수록 분위기가 점점 파장이 났다. 누구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집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다 여관방으로 실려 갔고, 누구는 에스티니앙처럼 아예 테이블에 엎어졌다. 가족이 데리러 온 사람도 있었고 혼자 뻗은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덜 취한 사람들이 만취자들을 수습하는 동안, 아실은 일어날 기미가 없는 애인 곁에 팔을 괴고 엎드렸다. 술기운 탓에 머리가 멍하고 주변의 소음이 잘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에스티니앙과 자신,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아실은 손을 뻗어 애인의 귓바퀴를 살살 문질렀다. 술을 마시고 뻗은 게 몇 시간 전인데도 아직 뜨끈뜨끈했다.
어디선가 자꾸 시끄러운 소리가 난다 싶더니 주점 분위기가 갑자기 흥겨워졌다. 누군가 ‘할로네의 은혜 가득한 새해가 되기를!’ 하고 외쳤다. 아실은 그제야 귓가에 맴도는 성가신 금속 소리가 새해의 첫 타종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치채고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부지불식간에 지나간 한 해가 아까웠고 막 시작된 한 해가 기대됐다.
기대감은 아직 낯선 감각이었다. 수십 년 전에는 그도 다음을 기대하는 법을 알았지만, 저항군 군복을 입고서 보낸 이십여 년이 그 세월을 깡그리 불살랐다. 그 이십여 년이 남기고 간 마음속의 폐허 위로 누군가와 함께 보낸 몇 년이 켜켜이 쌓였다. 사랑이 잎을 뻗은 자리 밑에 불타버린 땅이 있다는 걸 아실은 알았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옛사랑을 움켜쥔 채 뛰어든 전쟁에서 패배하고, 서쪽으로 도망치며 생각했다. 이젠 그 사람을 놓아줘야지, 나는 할 만큼 했어. 그런데 사랑은 그렇게 간단히 끝나지 않더라. 몇 번이나 던져버리려 했는데 손에 들러붙어서 좀체 떨어지질 않았다. 알라미고를 탈환하고 무너진 갈레말드를 보고 나서야 손아귀에서 미련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제야 죽은 사랑을 위해 추도사를 읊고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릴 수 있었다. 볕이 잘 드는 곳에 그 사람을 위한 묘석을 세울 수 있었다. 폐허로 돌아오는 길에는 네가 서 있었지. 자기가 뭘 하는 줄도 모르는 채, 성큼성큼 걸어와서 다짜고짜 사람을 휘저어놓고…. 하필 그때 알아버린 거야. 내가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너를 거기 세워두었다는 걸 말이야. 폐허로 이어진 길목에, 사랑만이 오갈 수 있는 문 바깥에. 내가 문을 열지도 않았는데 너는 다 무너진 돌담을 겁도 없이 넘어오더라.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다는 걸 모르고….
아실은 슬슬 애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저녁 느지막이 집을 나서서 몇 시간째 엎드린 뒤통수만 봤으니까. 얼굴을 가린 팔을 치우고 머리카락도 걷어냈다. 집적거리는 게 성가신지 불만 가득한 신음이 끙끙 새어 나왔다. 곯아떨어진 사람한테는 들리지도 않을 텐데, 아실은 에스티니앙을 살살 달래가며 팔에 묻은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렸다.
막상 드러난 얼굴은 꽤 웃겼다. 머리카락은 잔뜩 흐트러져서 얼굴 이곳저곳에 달라붙었다. 이마께가 빨간 것이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팔뚝에 오래 눌려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입만 우물거리는 게 상당히……귀여웠다. 팔불출처럼 군다는 자각은 있었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나 아니면 누가 널 이렇게 귀여워해 주겠니? 아실은 충동에 몸을 맡겼다. 뺨과 콧날, 턱, 빠끔 드러난 이마에 내키는 대로 입술을 떨궜다. 가벼운 쪽 소리가 연신 울렸으나 주점이 시끄러웠으므로 아무도 듣지 못했다.
아실은 애인에게 실컷 입을 맞췄다. 그러다 입술을 떼려던 순간 느닷없이 목덜미를 잡혔다. 머리카락 사이로 찔러 들어와 목을 꽉 움키는 손과 절묘한 강도로 누르는 힘, 약간 높은 체온이 무척 익숙했다. 그는 꼼짝없이 끌려갔다. 인중과 입꼬리 사이를 헤매다가 간신히 알맞은 요철을 찾아냈다. 입술이 느슨하게 맞물렸다. 다급하게 매달린 손에서 그제야 힘이 빠졌다. 목덜미를 달래듯이 어루만지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에스티니앙은 얕은 입맞춤이 성에 안 찬다는 듯 조금씩 몸을 밀어붙였다. 능숙하게 파고들어서 혀를 감고, 숨을 갈취하고, 깊숙이 뒤쫓았다가 적당히 놔주었다. 조금만 지루해지면 마음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아실은 얌전히 키스를 따라갔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내심 기특해하면서도 애인의 농탕질에 밀려나지 않도록 버텼다.
엎치락뒤치락 호흡을 나누다 보니 숨이 가빠졌다. 혀를 거둔 에스티니앙은 입술만 가만히 붙이고 헐떡거렸다. 아실은 애인이 지금쯤 약간 정신없는 상태일 거라고 짐작했다. ‘집까지 걸어갈 수 있겠어?’ 묻자 에스티니앙은 신음했다. 그러곤 다 풀린 혀로 안 될 것 같다고 웅얼거렸다. ‘어쩔 수 없네. 자고 갈까? 키스도 좀 더 하고.’ 그렇게 대꾸하고서 아실은 애인을 밀어냈다. 키스에 한눈을 팔았다간 묵고 갈 방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옷자락을 잡히는 바람에 테이블을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에스티니앙은 흐린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물었다. ‘돌아올 거지….’ 깜찍하기 그지없는 어리광이었다. 아실은 애인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빨리 돌아올게.”
그러곤 옷자락에서 손을 떼어냈다. 에스티니앙은 옷을 놓친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떼를 쓰지는 않았다. 대신 얼른 오라고 한 번 더 보챘다.
다행히 빈방이 남아 있었다. 객실 열쇠를 받아서 돌아가던 중 아실은 문득 놀랐다. 다른 사람한테 돌아가겠다고 말해본 게 얼마 만이던가? 오랫동안 그는 이 말을 절박한 부탁이나 기약 없는 작별로만 주고받았더랬다. 일상적인 밀어, 가벼운 어리광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의식했더니 돌연 마음이 벅찼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사랑스러워서인지, 미안해서인지. 아실은 늘 자신의 감정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에스티니앙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였다. 앉혀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늦어지면 성큼성큼 걸어올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에스티니앙을 떠올리자 복잡하게 뒤엉킨 마음이 조금은 단순해졌다. 아실은 실없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술기운 탓으로 돌렸다. 그래도 자꾸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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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니앙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에 눈을 떴다. 가장 처음으로는 낡은 대들보가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는 턱을 간질거리는 귀의 감촉과 품 안의 체온이, 그다음으로는 침구에서 올라오는 먼지 냄새와 독한 술을 뒤집어쓴 듯한 냄새가 느껴졌다. 술 냄새의 출처가 둘 중 누구라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인지, 다행 중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전날 일을 되짚어보니 기억이 뚝 끊겨 있었다. 술을 자꾸 권하기에 두어 잔 마시다가 위험할 것 같아서 사양했는데, 하필 그 자리에는 아군이 없었다. 스승, 은퇴한 선배, 옛 수하들이 죄다 한통속이었다. 안 마신다고 버텼더니 채워놓은 잔만이라도 비우라면서 강제로 입에 술을 부었다. 주정이 목구멍으로 넘어간 순간 시야가 암전됐다. 그러곤 아실이 뜬금없이 꿈에 나왔다. 안겨있는 걸 보면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지만….
꿈 아닌 꿈의 기억은 어렴풋했다. 무척 좋았다는 느낌이 남아 있어서 취중에 있었던 일로 치부하고 잊어버리기에는 약간 아쉬웠다. 에스티니앙은 기억을 떠올릴 방도가 없나 싶어서 애꿎은 애인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분명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궁금해할 터였다. 대답을 들으면 놀리려 들겠지. 에스티니앙은 헛된 시도를 그만두고 현재를 바라보기로 했다. 가령 지금 주점으로 내려간다면 해장용 스튜 같은 걸 주문할 수 있을까…. 운이 좋다면 2인분쯤은 충분히 챙겨 올 수 있을 터였다. 아실을 깨워서 그걸로 빈속을 달래고, 그리고.
돌아가야지. 집으로.
그 순간 에스티니앙은 느닷없이 가슴께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듯했다. 새삼스러운 동시에 어이가 없었다. 아실과 같이 살게 된 뒤부터 그는 늘 돌아갈 곳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까. 에스티니앙은 명치에 맺힌 감정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했다. 어쩌면 전날 만났던 사람들 탓일 수도 있었고, 아홉 구름 여인숙의 낡은 시설 때문일 수도 있었고, 그런 곳에서 누군가와 한데 뒤엉킨 채 깨어나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두통이 사정없이 골을 두들겨대는 바람에 무엇 하나 오래 물고 늘어지지 못했다. 에스티니앙은 원래도 복잡한 감정을 일일이 파헤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느낄 뿐. 그는 어쩔 수 없이 희미한 향수에 잠겼다. 그러다 책임져야 할 애인이 같이 누워 있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에스티니앙은 스튜 두 그릇에 곁들여 먹을 빵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아실은 웬일로 순순히 일어났다. 자는 걸 깨우면 늘 짜증을 내던 녀석이…. 둘은 이불을 대충 밀어놓고 매트리스에 소반을 올려놓았다. 옆으로 나란히 걸터앉아서 그릇을 손에 들고 아침 식사를 했다. 그러다 에스티니앙은 문득 애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막 일어난 탓에 얼굴이 부어 있었다. 평소보다 동그래진 이목구비가 제법 웃겼다. 귀엽기는 했지만. 아실이 불순한 시선을 눈치채기 전에 그는 얼른 숟가락을 물었다.
스튜는 묘하게 익숙한 맛이었다. 에스티니앙은 식사 내내 이걸 어디서 먹었는지 생각해 봤지만, 결국 기시감의 원인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아실은 스튜가 입맛에 맞았는지 집에서도 만들어 먹자고 했다. 종종 먹다 보면 기억이 떠오를지도 몰랐다.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