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 창과 활

-250530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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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니앙은 하나뿐인 호적수가 격투에 이렇다 할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종종 애통하게 여겼다. 아실로 말할 것 같으면 땅바닥에서 구르나 침대에서 구르나 그게 그거라는 뜻을 고수했다. 그 탓에 둘 사이에서는 무기를 사용한 대련이 좀체 성사되지 않았다.
“네가 거리만 좁히면 다 끝날 텐데 대련은 무슨 대련이니!”
상성이 나쁘다는 아실의 투덜거림 앞에서는 에스티니앙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이 대련을 위해 무기를 쥔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새벽의 혈맹이 울티마 툴레에서 귀환한 뒤, 아실이 올드 샬레이안에서 한창 요양 중이었을 때.
환자를 끌고 나간 건 아니었다. 치유사 대신 에스티니앙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긴 했지만, 자기 몸 하나는 끔찍하게 챙기는 아실도 아직 아픈 사람에게 무슨 소리냐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았으니까. 무기 상성에 대해 한창 왈가왈부하며 다투던 중 둘의 얘기를 우연히 들은 알리제가 자신과도 대련하자고 조르고, 알리제와 함께 라스트 스탠드에 다녀오던 그라하 티아가 조심스럽게 참관 의사를 밝히고, 아실의 몸 상태를 뒤늦게 떠올린 알리제가 쌍둥이 형제를 끌고 오면서 순식간에 사람이 불어났다. 아실이 찾은 최후의 도피처는 마땅한 장소가 없다는 핑계였지만 산크레드가 라비린토스 쪽에 괜찮은 곳이 있다고 불쑥 참견하는 바람에 퇴로는 완전히 막혔다. 아실은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은 삼세판이었다. 아실은 기왕 이렇게 된 거 무기를 바꿔가며 파트너와 놀아주기로 했다. 다신 안 할 거니까 실컷 즐겨두라는 거였다. 에스티니앙은 눈썹을 슬쩍 찡그렸으나 반박하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은 활이었다. 이걸 들면 거리 싸움을 하게 될 텐데? 묻자, 아실은 어쩔 수 없다고 대꾸했다. 그는 몇 주 만에 본격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처지였다. 일반적인 훈련이라면 아무거나 잡아도 상관없었지만, 대련이었으므로 가능하면 손에 가장 익은 무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야 빨리 적응할 수 있을 테니까.
“실전이 아니니 져도 어쩔 수 없지.”
“실전이었으면 뭐가 달라지나?”
벌써 체념하는 태도가 못마땅해 딴지를 걸었더니, 아실은 생긋 웃었다. 온화한 표정과는 달리 대답에는 다소 사나운 구석이 있었다.
“눈을 쏠 수 있다는 거?”
에스티니앙은 곧장 말뜻을 알아들었다. 용을 사냥하던 시절에는 궁사들과 자주 합을 맞추곤 했으니까. 대련치고 손속이 격해지지 않을까 싶었으나 생각해 보니 참관객 중 치유사만 셋이었다 (알리제는 치유사라고 하기에는 쓸 수 있는 치유 마법이 적었지만, 에스티니앙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으면 모두 치유사로 여기고는 했다). 그 정도면 자신과 아실, 둘에게 하나씩 붙어도 남은 사람이 오며 가며 보조해 줄 수 있었다. 사서 걱정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숫자였다.
아실이 감을 잡는다며 연습용 화살을 쏘는 동안 에스티니앙도 몸을 풀었다. 평소처럼 갑주를 입자니 고작 대련에 너무 유난을 떠는 것 같아 산크레드에게 적당한 경갑을 빌린 차였다. 몸에 딱 맞지는 않아서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아실에게 이 정도 보너스는 줘야 했다. 어차피 몸을 움직이다 보면 에스티니앙은 금세 적응할 터였다.
원거리 공격수인 아실을 배려해 에스티니앙은 멀찍이 섰다. 대놓고 아실을 응원하는 알리제의 목소리와 둘 다 힘내라고 외치는 알피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고 방지 요원으로 따라온 산크레드가 그라하 티아에게 무언가 당부하는 것이 보였다. 그 모든 일들이, 아실이 화살을 꺼내 느슨하게 시위에 걸친 순간 안중에도 없어졌다. 활촉이 서서히 위로 올라와 표적을 겨냥했다. 에스티니앙은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우선은 거리를 좁혀야 한다. 높이 뛰어오르는 건 금물이다. 상대가 웬만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 아실이다. 십중팔구 체공 시간을 노려 쏘리라. 명중률은 조금 떨어질 테지. 급소를 피해야 하니까. 손쓸 틈 없이 당하는 건 달갑지 않다. 그래서 대련은 초반부터 에스티니앙의 추격전이다. 그는 쉼 없이 쫓고 아실은 온갖 기교를 동원해 도망간다. 뒤로 뛰며 속사를 날린다. 집요하게 발목을 노린다. 화살이 온몸을 스쳐 지나간다. 에스티니앙이 느닷없이 멈추면,
아실도 동시에 멈춘다. 이쯤에서 숨을 골라야 한다는 걸 둘 다 알고 있다. 에스티니앙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고른다. 경갑에 부딪치는 화살은 가죽을 뚫을 기세인데 무장하지 않은 곳은 하나같이 상처가 얕다. 봐주는 건가 싶어서 헛웃음도 나고, 숨이 차도록 도망가는 주제에 표적을 가려 쏘는 정밀함이 어이가 없고, 뒷골이 띵할 정도로 만족스러워서…. 에스티니앙은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화살은 이따금 엉뚱한 방향에서 날아온다. 에스티니앙은 이내 의도를 알아차린다. 몰이사냥을 할 셈이다. 실력이 괜찮은 궁사가 두엇 더 있었다면 성공했겠지만,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사격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사가 쏟아진다. 에스티니앙은 결국 멈춰 선다. 창을 휘둘러 한차례 화살 세례를 떨친다. 그제야 뛰쳐나갈 틈이 난다. 화살의 궤적은 갈수록 정교해진다. 에스티니앙은 화살을 피하느라 바닥을 구른다. 자신의 처지를 되새긴다. 뒤쫓는 건 나다. 이 사실을 잊으면 이겨도 진 것이나 다름없다.
대련 상대를 생채기투성이로 만들고, 자신은 땀투성이가 되어서야 아실은 항복 선언을 했다. 화살통이 텅 비었기 때문이다. 창 한 번 제대로 들이대지 못하고 이긴 셈이다 보니 에스티니앙은 결과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승패는 승패였다. 그는 아실을 도망가지 못할 지경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관전하던 사람들이 화살을 줍는 동안 둘은 나란히 앉아 휴식을 취했다. 실전이었으면 독을 발랐을 텐데. 아실은 무시무시한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으며 팔을 주물렀다. 에스티니앙은 화살이 스친 볼을 괜스레 문질렀다.
알피노와 그라하가 각각 몸 상태를 점검해 준 뒤 대련이 속개되었다. 아실은 양손에 차크람을 걸고 발뒤꿈치를 가볍게 들었다. 아까보다 가까워진 거리에 에스티니앙은 창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차크람이 교묘한 각도로 날아든다. 아실은 차크람 한 쌍을 모두 선제공격으로 던져버린다. 에스티니앙은 창을 휘둘러 차크람 하나를 멀리 쳐낸다. 성큼 거리를 좁힌다. 무방비한 상대를 창의 간격에 넣는다. 그러나 아실은 물러나기는커녕 훌쩍 뛰어 들어온다. 무슨 의도지? 신경이 곤두선다. 다음 순간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허리춤에 매인 단도를 발견한다. 그는 그제야 상대의 대담함을 이해한다. 창은 지나치게 파고드는 적과 상성이 좋지 않다. 일단 밀어낼까. 창대로 아실을 가로막으려던 찰나 느닷없이 머리 위가 서늘해진다. 에스티니앙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힌다. 회전하며 떨어지는 원륜에 앞머리가 썩둑 잘린다. 아실의 손이 그것을 물 흐르듯이 받아낸다. 차크람의 바깥날이 매섭게 얼굴을 스친다. 쓰라린 통증이 콧잔등을 가른다. 그래, 이제 접근전만이 능사는 아니란 거군? 거리 싸움이 한층 까다로워졌음을 깨닫고, 에스티니앙은 호승심에 불이 붙는다.
박투가 이어진다. 둘은 자신의 간격을 유지하며 치열하게 맞부딪친다. 쫓고 쫓기고, 따라붙고 따라잡힌다. 격투술보다는 춤에 가까운 동작 탓에 에스티니앙은 파트너와 스텝이라도 밟는 것 같다. 그러나 아실의 박자에 익숙해지는 순간, 시야 바깥에서 차크람이 엇박자로 공격해 들어온다. 이번에는 피할 수 있다. 하늘을 경계하며 싸운 경험이 뜻밖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또다시, 에스티니앙의 창이 차크람을 멀리 쳐낸다. 거의 동시에 아실은 상대에게 다리를 건다. 에스티니앙은 균형을 잃는다. 넘어지는 그를 단도가 뒤쫓는다. 칼날이 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친다. 에스티니앙은 숨을 훅 토해낸다. 바닥에 박힌 칼날이 살갗을 건드렸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무승부로 할까?’ 아실은 단도를 거두며 제안한다. 에스티니앙은 그제야 창대를 쥔 손에서 힘을 푼다. 당장이라도 아실의 무릎을 벨 것 같았던 창날이 스르르 떨어진다.
마지막 무기는 총이었다. 활과 차크람 중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는 말에 에스티니앙은 의아해했다. ‘안 써본 게 있던데.’ 재미없을 거라는 충고에도 그는 미련을 보였다. 아실은 할 수 없이 탄창을 갈아 끼웠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지시대로 대기 지점에 섰다. 활을 들었을 때보다는 가깝고, 차크람을 들었을 때보다는 멀었다. 탕! 총성이 예고도 없이 귀청을 찢었다.
아실은 총알로 에스티니앙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동력원으로 번개 속성 에테르를 쓰는 모양인지, 맨몸에 탄환을 맞으면 저릿저릿한 느낌과 함께 근육이 마비됐다. 총알이 워낙 작고, 속도가 무척 빨라서 피하기 힘들었다. 신속한 연사가 이어진 탓에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려웠다. 에스티니앙은 탄환을 피해 바닥을 구르기까지 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진 싸움이라는 판단이 서자마자 그는 항복을 외쳤다. 바닥에 드러누워서 욱신거리는 피격 부위를 주무르고 있으려니, 머리 위로 불쑥 그림자가 졌다. 아실이었다.
“재미없지?”
그렇게 말하며 아실은 손을 내밀었다. 에스티니앙은 순순히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렇더군, 수긍하며 몇 마디 불평하자 아실은 어른 말을 들었어야지, 라고 놀렸다. 알피노가 간단한 치유 마법을 걸어주는 틈을 타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슬쩍 떠봤지만, 실컷 놀아줬으니 만족하라며 단칼에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