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첫날

-250615 작성

-드림 3주년 기념 글

-주의: 이슈가르드 역법, 정교회 체계 관련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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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생일을 제때 챙겨본 적이 없었다. 아실의 생일이 매년 ‘오늘 내 생일이야.’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첫해의 선언은 여관 침대를 벗어나 창문을 열어젖힌 직후였고, 그다음 해는 바람이 잘 통하는 숙소 식당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였다. 올해는 산책 도중 꽃 냄새가 난다며 한참 덤불을 찾아다니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에스티니앙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작년엔 며칠 더 빨랐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아실의 답변은 퍽 알쏭달쏭했다.
“여름이 늦게 와서 그래.”
애인은 덧붙였다. ‘내 생일은 여름의 첫날이거든!’ 골모어 대밀림을 떠나기 전부터 쭉 그렇게 챙겨왔고, 워낙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매년 날짜가 근소하게 달라진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밖에 나온 뒤로 몇 년 동안은 아예 안 챙기기도 했고…. 기념하려고 보니까 기억나는 게 여름의 첫날이란 것밖에 없더라.”
당시 지인이었던 용병들은 돈 계산에나 능했지, 생업과 관련 없는 먼 나라 역법에는 문외한이었다. 게다가 아실조차도 정확한 날짜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생일을 기념하는 행위 자체였으니까. 여름의 첫날은 친구나 동료와 술을 마실 핑계가 되기도 했고, 애인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구실이 되기도 했다. 혼자 지낸 해도 있었지만 자기 자신을 대접해도 되는 날이 매년 돌아온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네 생일은 챙긴 적이 없네. 언제야? 이미 지나간 건 아니지?”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실은 고작 그 나이 먹고 생일을 잊어버리냐고 핀잔을 줬지만, 그래도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였다.
산간 벽촌의 평민들은 날짜를 셀 때 달력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역법은 나뭇가지에 돋은 새순과 산맥을 넘어 돌아오는 철새, 새끼를 배기 시작한 가축을 기준으로 삼았다. 여기에 할로네 정교의 연례행사가 끼어들어 한 해의 질서를 잡았다. 12살의 에스티니앙은 자기 생일이 언제인지 알았지만, 펀데일이 불탄 뒤부터는 날짜를 셀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성도의 달력에 쓰인 건 숫자뿐이었다. 산비탈의 야생 사과나무가 언제 꽃을 피우고, 우리의 양들이 언제 새끼를 배는지가 아니라.
사룡에게 복수하겠다는 제자를 들인 뒤 알베리크는 아이의 두 번째 세례식을 준비했다. 신전기사단에 입단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세례 기록이 있어야 했는데, 펀데일에 있었던 기록물은 모두 불타버렸으니까. 세례식 날짜를 정한 뒤 알베리크는 지나가는 말로 아이의 생일을 물었다. 제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세례식이 끝나고 에스티니앙은 과자가 담긴 작은 주머니를 받았다. 그것이 알베리크의 첫 번째 생일 선물이었다.
정작 에스티니앙은 세례식 날을 생일로 여기지 않았다. 독립한 뒤부터는 아예 없는 날인 셈 쳤다. 그날은 진짜 생일이 아니었으니까. 알베리크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선물을 받았을 뿐. 설령 진짜 생일이었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가족의 복수를 끝내지 못했는데 태어난 날 따위를 챙길 염치가 어디 있으랴? 스승에게는 대놓고 말할 수 없는 속내였으므로 이를 아는 사람은 아이메리크가 다였다. 친구는 가끔 자네 묘비엔 뭐라고 쓰나, 라고 타박했고 에스티니앙은 내 기일은 틀림없이 경사스러운 날일 테니 그것만 써도 충분할 거라고 받아치곤 했다. 고약한 자기 예언 탓인지 그는 하마터면 젊은 나이에 묘비를 세울 뻔했다.
숙원을 이뤘다고 해서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여전히 자기 생일에 관심 없었다.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온갖 관습이 유난스럽게 느껴졌다. 잃어버린 지 오래된 것은 슬슬 놔줘야 하지 않나 싶었다.
“생각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
관심 가는 화제 앞에서 아실은 집요해졌다. 재촉인지 격려인지 모를 물음에 쫓겨 기억을 더듬던 에스티니앙은, 할로네 정교 축일이 지나면 머지않아 생일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간신히 떠올렸다. 축일이 언제쯤 있었느냔 질문에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아실은 혀를 찼다. 그는 애인이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여름인데 추울까?”
에스티니앙은 재해 이후 이슈가르드의 여름 날씨를 떠올려보았다. 아실을 그냥 보냈다가는 틀림없이 감기에 걸린 채 돌아올 터였다. 성당에 기록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건 그래서였다.
“남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에스티니앙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실은 침묵 속에서 ‘그래도 갈 거냐?’라는 뒷말을 들었다. 애인이 생일 얘기를 내키지 않아 한다는 것도 알아차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생일 선물 아직 안 줬잖아. 그걸로 해.”
치사한 핑계였다. 에스티니앙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짐을 챙기자며 숙소로 먼저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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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기록 보관실은 쉬이 열렸다. 응대를 맡은 사제는 아실이 얼굴을 드러낸 순간 반색했다. 사제는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출입 허가를 받아 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에스티니앙이 ‘나 혼자였으면 문전박대당했겠는데.’라고 속삭이자, 아실은 소리죽여 웃었다.
둘은 기록 보관실로 가면서 방문 목적을 밝혔다. 사제는 뒤늦게 당황했다. 출생기록부, 다시 말해 유아 세례자 목록은 다소 방만하게 관리되는 편이었다. 대성당에서 직접 세례받은 아이들에 관해서는 이름과 가문, 생일, 세례 날짜 등을 꼼꼼하게 정리했으나 지방 교회에서 보낸 사본들은 지역 단위로 모아놓은 게 끝이었다.
펀데일에서 온 기록을 찾으려면 커르다스 동부 지역의 기록을 들춰봐야 했다. 아실은 일단 가져와 보라며 의욕을 내비쳤다. 약 10분 뒤, 사제는 1545년에 작성된 서류 더미를 방문객들 앞에 내려놨다. 예상보다 양이 많았는지 아실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에스티니앙은 뺨을 때리며 미리 졸음을 쫓았다. 서류 지옥에 파묻히리라는 건 출발할 때부터 예상한 바였다.

 

삽화 ©M

둘은 종이를 절반씩 나눠 기록을 훑기 시작했다. 중간에 아실이 몇 번이나 이름을 잘못 읽어서 에스티니앙이 자기 이름 철자를 하나씩 불러주기도 했다. 그는 확인 작업을 먼저 끝내고서 아실이 맡은 서류를 한 번씩 더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기록을 모두 읽었는데도 에스티니앙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사제에게 물어봤더니,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예배당들은 종이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 2, 3년 치 기록을 한꺼번에 보내기도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두 사람은 다음 해와 그다음 해의 기록도 뒤져봤다. 3분의 1 정도를 들춰봤을 즈음 기록 보관실 개방 시간이 끝났다. 다음날 다시 대성당을 방문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아실은 미련 넘치는 손길로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찾아보자….’ 에스티니앙은 누락 된 서류가 얼마나 찾기 힘든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용기사단 시절의 경험담까지 꺼내야 했다. 그런 뒤에야 아실을 기록 보관실에서 끌어낼 수 있었다.
성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세례 기록을 찾지 못했다는 건 현재 에스티니앙의 신원에도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알아봤더니 교회 기록상으로는 그가 죽은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사제의 말에 따르면 마을 단위로 사망자가 생긴 탓에 서류 처리 담당자가 사실관계를 혼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 그래요…. 그럴 수 있지. 용병 길드들도 행정은 꽤 주먹구구니까. 산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드는 일은 드물지만요. 조합비 몇 푼 아끼자고 조사원을 얼마나 굴리는지…. 민간 조직에는 이런 일에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 교회랑은 달라서.”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말끔한 낯빛 아래에서 조용한 분노가 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말끝에 은근히 가시가 돋쳐 있었으니까. 사제는 자신이 들은 게 에두른 비난인지, 아니면 단순한 경험담인지 알쏭달쏭한 눈치였다. 에스티니앙은 내심 혀를 찼다. 죽은 사람 취급당한 건 난데, 네가 왜 난리냐? 말소된 신원 때문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일이 터지려면 신전기사단 입단부터 삐걱댔을 것이다. 세례식 하나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 없으니, 누군가 따로 손을 써뒀으리라. 아마도 알베리크겠지. 지금까지 말해주지 않은 이유도 짐작이 갔다. 눈앞에서 고향이 불탄 어린아이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중엔 아예 까먹었을 거고.
끝난 일로 괜히 속을 끓일 필요는 없었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말렸다. ‘괜찮아, 봉급 밀린 적은 없다. 퇴직금도 잘 받았고.’ 아실은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으냐고 못마땅해했지만, 더 이상 날 선 말을 뱉지는 않았다.
아실은 사제에게 펀데일 쪽의 유아 세례 기록이 남아 있을 만한 곳이 더 있는지 물었다. 사제는 펀데일 근방의 교구일 거라고 대답했다. 작은 마을들이 근방의 큰 교구로 기록을 보내면, 기록을 받은 교구는 서류를 취합해 성도로 발송했다. 다만 펀데일은 20년 전에 사라진 마을이라 어느 교구를 징검다리로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내친김에 교구 위치가 기록된 지도를 베끼기로 했다. 전쟁 영웅들의 요청이라서인지 허가는 금방 떨어졌다.
여행 물자를 보충하다 보니 남은 하루가 다 갔다. 둘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동부고지로 출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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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고지에서 만난 교구 사제들은 하나같이 펀데일은 자기들 관할지가 아니라고 했다. 개중 몇몇 교구는 예상보다 규모가 작았고 또 몇몇 지역은 아예 폐허였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교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이 떠난 건 7재해 때문일까, 아니면 니드호그가 펀데일을 불태우고 지나간 탓일까? 이제는 알 수 없었다.
“끝까지 허탕이네. 여기가 제일 가능성 높았는데….”
이 교구는 펀데일과 제일 가까웠다. 지도를 베끼던 에스티니앙이 교구 이름을 보고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여기라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아실은 아쉬워하며 폐허를 돌아다녔다. 얼어붙은 강대를 쓸어보기도 하고 예배당에 딸린 문을 밀어보기도 했다. 에스티니앙은 그런 애인을 슬금슬금 따라다녔다. 찾기 어려울 거라고 반쯤 확신한 채 길을 나선 거였는데, 막상 아쉬워하는 아실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길을 떠나기 전에 말렸으면 좋았을까?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이내 달라지는 게 없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아실이라면 그래도 둘러봐야겠다며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어쩌면 에스티니앙은 내심 기록을 찾길 바랐던 걸지도 몰랐다. 생일이 언제인지 새삼 궁금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오래 전, 두 번째 세례식 날 매듭지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채 지금까지 살았다. 다만, 에스티니앙은 실망하는 아실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성도로 돌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쌓인 눈이 아직 얼지 않은 탓에 발이 푹푹 빠졌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길을 냈다. 그 탓에 아실의 말을 반쯤 놓쳤다. ‘뭐라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생일 말이야! 너도 그냥 정하는 건 어떠냐고.”
에스티니앙은 조금 놀랐다. 아실의 목소리에는 실망한 기색이 한 점도 없었다. 기록을 찾지 못해 아쉬워했던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벽에 가로막힌 듯 끝난 일 앞에서 의외의 전환점을 찾는 모습이 아실다웠다. 그래도 에스티니앙은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생일을 굳이 만들어가며 챙길 마음은 여전히 들지 않았으니까.
때마침 아실이 언 땅을 잘못 밟은 듯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몸을 기대오는 애인을 지탱해 주던 에스티니앙은 문득 상대방의 옷차림에 눈길이 갔다. 아실은 몇 벌 안 되는 겨울옷을 꼼꼼하게 여며 입고, 눈 바로 밑까지 목도리를 단단히 두른 채였다. 온난한 땅에서 오래 산 탓인지 애인은 유독 추위에 약했다. 재해 이후, 커르다스 일대는 여름이 되어도 날씨가 예전만큼 풀리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추운 것도 싫어하는 녀석이 고작 생일 하나 알아보겠다고…. 아실이 자세를 바로잡은 뒤에도 에스티니앙은 침묵했다.
“꼭 정해야 하나?”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아실은 가벼운 투로 대꾸했다.
“안 그래도 돼. 하지만 있으면 좋을걸?”
생일이라고 유난을 떠는 건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아실도 생일날 큰 법석을 피우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좋은 날을 핑계로 안 하던 짓을 하는 정도였다. 식전주로 먹어본 적 없는 술을 마셔본다거나, 평소 지나치던 노점상에서 싸구려 장신구를 몇 점 산다거나, 흔쾌히 들어주기 난감한 요구를 한다거나…. 당한 만큼 돌려줄 수 있겠거니 생각하자 구미가 당겼다. 일 년에 하루뿐이지만, 조금 더 즐거워지리라. 아실이 권하는 일은 늘 그랬으니까. 에스티니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티니앙에게 신통한 의견이 있을 리 없었으므로 날짜를 정하는 건 자연히 아실 몫이 되었다. ‘언제가 좋아?’ 아실은 귀를 연신 쫑긋거리며 물었다. 그는 에스티니앙에게 의미 있는 날을 꼽아보다가 이내 방향을 틀었다. 생일은 거리낌 없이 축하할 수 있는 날이어야 하니까. 가늠하기 쉽게 열두 신 축일을 기준으로 삼자는 의견도 곧 폐기되었다. 열두 신 신앙에 대해서는 두 사람 다 아는 게 없었다. 결국에는 계절의 변화를 지표 삼기로 했다.
아실은 봄의 첫날이 어떠냐고 물었다. 겨울과 봄은 경계가 명확한 편이었다. 계절에 예민하지 않은 에스티니앙도 변화를 알아차리기 쉬울 터였다. 이어진 말이 아니었다면 그는 곧바로 동의했을 것이다.
“괜찮지? 서너 달뿐이지만, 나이 차이도 줄어들고.”
에스티니앙은 애인을 슬쩍 째려봤다. 아흔네 살이나 아흔다섯 살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기어이 한 마디 놀리려 드는 게 얄미웠다. 에스티니앙은 투덜거렸다.
“아예 여름의 첫날로 하지, 왜. 그게 더 기억하기 쉽겠군.”
아실은 끈질겼다. “나이 차를 줄일 기회인데도?”
“됐다, 그냥 네 생일이랑 같은 날이라 쳐.”
아실은 올해부터 축하할 수 있도록 가을이나 겨울은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에스티니앙은 강경하게 여름의 첫날을 고집했다. 아실은 그제야 놀리기를 포기했다.
“기껏 정했는데 이미 지나가서 아쉽다.”
“아쉬울 것도 많다.”
에스티니앙은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아실은 말투를 지적하는 대신 킥킥 웃었다. 자기가 짓궂게 굴었다는 건 아는 모양이었다. 애인은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다정하게 손깍지를 했다. 에스티니앙은 옆구리에 파고드는 익숙한 무게와 온도에 다소 기분이 풀렸다. 한편으로는 고작 이런 행동에 너그러워지는 자기 자신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언짢은 마음도 아실의 속삭임을 들은 순간 눈처럼 녹아내렸다. ‘생일 선물 고마워. 난 뭘 주지?’
에스티니앙은 대꾸 없이 눈길을 헤쳐 나가는 일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눈 위에서 산란하는 햇빛처럼 마음이 자꾸 술렁거렸다. 결국 그는 입을 열었다. ‘이미 줬잖아.’ 못 알아듣는 눈치여서 한 마디 덧붙였다. ‘생일.’ 놀림당할 것을 각오하고 꺼낸 말이었는데 아실은 의외로 얌전히 말을 받았다. ‘다행이다. 너도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마치 에스티니앙의 귀와 뺨이 찬바람에 얼어붙어서가 아니라, 속에서부터 달아올라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칼바람이 불었다. 두꺼운 외투 너머로 아실이 추위에 바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에스티니앙은 팔짱을 단단히 고쳐 끼고서 발을 재촉했다. 설원을 지나면 여름이리라. 연인들은 계속 걸었다. 여름이 두 사람을 맞아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