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이

-250622 작성

-소재 제공: 쇠약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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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뒤로 에스티니앙은 이따금 펀데일을 방문했다. 지난 20여 년간 발길을 끊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문득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근방을 지날 일이 생기면 겸사겸사 들르는, 딱 그 정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므로 누군가와 함께 갈 생각 역시 해본 적 없었다. 기껏해야 애인에게 몇 마디 얘기하는 정도였다. 최근 고향에 갔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거나, 근처까지 가는 의뢰를 받은 겸 다녀올 생각이라거나. 아실은 얘기를 들어주긴 해도 큰 호기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그 점이 편했다. 스승과 친구, 사연을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아실만큼 덤덤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다니아에서 끝나는 호위 의뢰를 수락하고 보니 다녀올 때가 됐지, 싶었다. 아실과 같이 받은 일감이었으므로 일이 끝나면 잠시 헤어지기로 했다. 이후의 일정을 두런두런 의논하다가 에스티니앙은 문득 생각했다. ‘좀 걸릴 것 같은데.’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빨리는 못 보겠지.’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같이 가는 건 어때.”
말해놓고서 에스티니앙은 제풀로 놀랐다. 겸연스럽게 턱을 문지르고 있으려니 아실도 의아해했다. ‘네 고향에? 갑자기?’ 반문과는 달리 수락은 빠르고 흔쾌했다. ‘그러지, 뭐. 따로 할 일도 없고.’ 에스티니앙이 무어라 변명하거나 덧붙일 틈도 없었다.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에스티니앙은 동부고지 초입에 아실과 함께 서 있었다. 성도에서 물자를 보충했기 때문에 가방은 아직 식량으로 묵직했다. 그런데도 에스티니앙은 어쩐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뾰족한 팔꿈치가 그의 허리를 장난스럽게 찔렀다. ‘뭐해, 앞장서.’ 길을 재촉하는 아실의 목소리를 들은 뒤에야 에스티니앙은 덜컥 걱정이 들었다. 잠자리는 어떻게 하지?
동부고지 깊이 들어갈수록 민가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두 사람은 중간중간 노숙했다. 펀데일에 들어서기 전에는 다행히 지붕 아래에서 쉴 수 있었다. 동부고지를 영역 삼은 사냥꾼이 만들어놓은 쉼터였다. 둘은 얼어붙은 손발을 녹일 겸 스튜를 끓여 배를 채웠다. 쉼터를 떠나며 에스티니앙은 늘 그랬던 것처럼 사례금 몇 푼을 놓고 갔다. 다음에 왔을 때 아르케오니스용 덫 같은 걸 밟기는 싫었으니까.
폐허가 점점 가까워졌다. 에스티니앙은 마을 입구에서 잠시 멈췄다. 다른 사람과 여기까지 와본 적이 없다 보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아실이 선수를 쳤다. ‘여기야?’ 에스티니앙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다녀오지.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그렇게 말한 뒤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실은 곧장 따라붙었다. 어딜 가느냐 캐묻기에 묘비를 보러 간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같이 가자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혔다. 둘은 이내 나란히 걷게 되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무슨 소리야? 인사는 해야지.”
비슷비슷하게 무너진 폐허 사이에서 에스티니앙은 단번에 목적지를 찾아냈다. 몇 년 전, 처음 돌아왔을 때 만들어둔 묘석 덕분이었다. 집터에 굴러다니던 돌을 마당에 박아놓은 것뿐이었지만 무덤을 표시하기에는 충분했다. 에스티니앙이 선 채로 성호를 긋고 기도하는 동안, 아실은 그 옆에 쪼그려 앉아서 손을 모았다.
기도는 길지 않았다. ‘둘러보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 아실은 그렇게 말하고서 훌쩍 자리를 떴다. 평소에는 에스티니앙 역시 짧은 기도로 성묘를 끝내고는 했지만, 오늘은 어쩐지 금방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문득 집터에 잠든 망자들이 손님의 정체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묘석을 내려다보며 아실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했다. 내용을 고심할수록 설명이 길어지는 바람에 결국 소개말은 ‘가끔 얘기했던 애인’쯤으로 정리되었다.
기도를 마친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찾아 발길을 돌렸다. 발자국이 남아 있어 추적하기 쉬웠다. 아실은 엉뚱하게도 마을 외곽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뭐해, 물었더니 이리 와보라는 듯이 손짓했다. ‘여기가 어디였는지 기억나?’ 에스티니앙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풍경을 훑는 동안 아실은 본인의 추측을 읊었다. 근처가 탁 트인 걸 보면 눈이 쌓이기 전에는 초지였을 것 같다, 어릴 때 양을 쳤다던데 혹시 이쪽으로 풀을 먹이러 가지 않았느냐…. 듣고 보니 눈앞에 펼쳐진 설원이 어딘지 익숙했지만, 그게 다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길을 잃은 건 아닐 테고.”
“네가 자란 곳이 궁금했거든. 다 알 순 없지만, 땅을 보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게 있으니까.”
아실이 내보인 다정한 호기심 앞에서 에스티니앙은 다소 쑥스러워졌다. 눈을 내리깔고 잠시 침묵하다가, 그는 물었다. ‘이 근처라도 구경할 테냐.’ 아실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은 얌전히 안내를 따라오다가 이따금 질문을 던졌다. 에스티니앙은 아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다 머릿속에 남아 있는 줄도 몰랐던 옛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고, 잊어버린 줄도 몰랐던 것을 잊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다.
관광은 머지않아 끝났다. 폐허에서 하룻밤 묵으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야숙 장소는 예배당이었다. 불과 세월, 그리고 추위에 폭삭 주저앉은 건물 중에는 그곳이 가장 멀쩡했다. ‘사령 같은 건 없겠지?’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 아실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에스티니앙은 의아해졌다. 유령을 특별히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는 문득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무섭나? 그 나이에.”
가볍게 놀릴 생각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이 사뭇 진지했다.
“너랑 안면 있는 시신을 훼손하는 건 좀 껄끄럽잖아.”
에스티니앙은 헛웃음을 지었다. 애인은 그를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노는데, 그가 애인을 골리기는 쉽지 않았다.
“청소는 처음 왔을 때 끝내뒀지. 아는 사람이 있었는지는, 글쎄…. 자세히 볼 걸 그랬군.”
에스티니앙은 덧붙였다. ‘너무 오래돼서 어차피 못 알아봤을 거다.’ 아실은 한결 안심한 기색으로 그를 따라 예배당에 들어섰다.
불 피울 자리를 찾던 두 사람은 작은 창고를 발견했다. 안에 있던 서랍장에는 술이 들어 있었다. 마시기에는 찝찝했으므로 불을 붙일 때만 쓰기로 했다. ‘사제가 술을 좋아했나?’ ‘예배용이었겠지, 아마도.’ 같은 대화를 나누며 둘은 창고 안의 가구를 들어내고, 출입문에 환기용 구멍을 뚫고, 가까운 건물을 뒤져 땔감을 모았다. 요리를 시도하기에는 공간이 협소했던 탓에 건량으로 간단하게 끼니를 때웠다.
담요를 두른 채 모닥불 앞에 앉은 아실을 보고 있으려니 에스티니앙은 기분이 묘해졌다. 펀데일에 처음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누군가와 함께 고향 땅을 밟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손님을 초대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이곳은 에스티니앙 자신에게조차 버려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막상 데려와 보니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싱숭생숭했고 이상한 충족감이 차올랐다. 에스티니앙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올라간 입가를 아실이 찌른 뒤에야 그는 자기 표정이 어땠는지를 깨달았다. 에스티니앙은 민망한 나머지 시선을 슬쩍 피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창고가 비좁았던 탓에 두 사람은 서로 바짝 붙어서 잠을 청했다. 밤새 바람 소리가 시끄럽더니 다음날은 하늘이 조금 갰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실은 근방을 좀 더 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발이 닿는 대로 걷다 보니 전날의 그 설원에 도착했다. ‘저길 올라가면 뭐가 보일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말하며, 아실은 설원에서 이어지는 완만한 비탈을 가리켰다. 마침 에스티니앙 역시 야트막한 언덕이 묘하게 눈에 밟히던 참이었다. 둘은 비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언덕배기에 오른 에스티니앙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쯤 오면 보여야 했는데…. 그는 자기가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채 되뇌었다. 언덕 아래를 연신 훑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에스티니앙은 발견했다. 떠나온 방향에 펀데일이 있었다. 새까맣게 무너진 가옥들이 멀리서도 선명했다. 폐허의 전경은 생소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에스티니앙은 예전에도 이렇게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찬찬히 더듬고 있으려니 어느새 곁에 아실이 나란히 서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곁눈으로도 애인이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잠시 후, 아실은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묘비 앞에서 기도를 끝내고 먼저 일어섰을 때처럼. 
“춥다. 이제 갈까?”
아실은 슬그머니 손을 잡았다. 에스티니앙은 손을 꿈지럭거리며 단단히 깍지를 꼈다. 짧은 작별 인사만큼의 침묵이 흐른 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손을 잡아당기며 먼저 걸음을 뗐다. ‘또 올 테냐?’ ‘너만 괜찮으면 난 좋아.’ 같은 대화를 나누며 둘은 언덕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