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왈츠

 

-소재 제공: 휘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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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은 아실이 의뢰비로 받아온 탁상용 오케스트리온이었다. 돈 대신 현물로 삯을 치르는 의뢰인은 드물지 않았으나 보수치고는 다소 뜬금없는 물건이었다. 아실은 덤으로 받아온 악보를 들으며 오케스트리온의 기능을 이것저것 시험해 봤다. 에스티니앙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지만 집중한 애인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조잘조잘 얘기해줄 터였다. 어떤 의뢰를 했기에 하필 이런 걸 보수로 받았는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아실 본인이 원한 것인지, 오케스트리온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그러나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기대를 배신했다.
“별빛축제 기간에는 쉴 거지?”
갑자기 웬 별빛축제란 말인가? 에스티니앙은 의아함을 뒤로하고 대꾸했다.
“일정은 없다만…. 뭘 하려고?”
“당연히 축제를 즐겨야지.”
아실은 별빛축제를 매년 기념한 양 으스댔다. 실제로는 의식해서 챙긴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아실은 라자한 출신이다 보니 다른 대륙의 풍습에 둔감했고, 에스티니앙은 자잘한 계절 행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 탓에 지금까지는 에오르제아 체류 기간과 축제가 겹치면 겸사겸사 분위기를 타는 정도였다. 아실이 덧붙인 말을 듣고 나서야 에스티니앙은 애인이 설레발친 이유를 이해했다.
“집에서 처음 맞는 별빛축제잖아!”
기왕 에오르제아에 정착했으니 집을 얻은 지역의 풍습을 따르고 싶다는 거였다. 이쯤 되니 에스티니앙도 오케스트리온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캐럴이라도 들으려는 모양이지. 아실은 축제 음악을 좋아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아이메리크네 응접실에도 오케스트리온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악보라도 빌려와야겠군. 에스티니앙은 약탈 계획을 세우며 아실의 잡담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아실이 ‘네 친구처럼 바쁜 사람한테서 휴일 분위기를 빼앗을 수는 없지 않으냐’라며 말리는 바람에 약탈은 불발되었다.
둘은 별빛축제 전통을 지킨 만찬을 들기로 했다. 서로에게 건넬 선물을 준비하고, 집을 산 뒤로 낯을 익힌 시장 상인에게 만찬용 도도를 예약하고, 트리용 나무 조달 의뢰로 빠듯한 예산을 채우기도 하면서(아실이 예전에 따놓은 원예가 자격증 덕을 톡톡히 봤다) 축제를 기다렸다. 만찬 날짜는 별빛축제가 무르익을 즈음으로 일찌감치 정해두었다. 당일이 되어서야 그들은 무언가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만찬 준비와 축제 구경을 동시에 할 수는 없었다! 아실은 시원스럽게 축제 구경을 포기했다. 도도가 이미 오븐에 들어갔으니 어쩔 수 없다면서.
만찬은 평소에 하던 저녁 식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리 가짓수만 약간 많은 정도였다. 그래도 와인과 도도 통구이, 잡화점 주인과의 치열한 상담 끝에 완성한 테이블 데코레이션 덕분에 그럭저럭 별빛축제 느낌이 났다. 아실이 고심해서 정렬한 음악이 오케스트리온에서 울려 퍼졌다. 둘은 정담을 나누며 접시를 비웠고, 식사가 끝나갈 즈음에는 선물을 교환했다. 그런 뒤에는 와인을 마저 들이켰다. 평소였다면 먼저 접시를 치우러 일어났을 텐데 아실은 오늘따라 게으름을 피웠다. 에스티니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식탁에 손대는 순간 만찬도, 축제도 끝날 터였다. 별빛축제 분위기에 조금 더 젖어 있고 싶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두 게으름뱅이는 사이좋게 술을 홀짝거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대화가 끊어졌다. 아실이 오케스트리온의 선율을 따라 흥얼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는 의자에 편안하게 기댄 채 손가락으로 잔 받침대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케스트리온에서 신나고 활기찬 악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순간, 아실은 발을 구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식탁 너머로 손을 뻗었다. 춤추자!
에스티니앙은 순순히 애인의 손에 끌려갔다. 언젠가 아실에게 배웠던 대로 스텝을 밟아보려고 했지만 동작이 익숙하지 않아 한 박자씩 발이 늦었다. 아실은 속도를 맞춰주는 대신 춤을 단순하게 바꿨다. 둘은 손을 잡은 채 경쾌한 걸음걸이로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아실이 의자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는 바람에 에스티니앙은 급하게 애인을 끌어당겼다. 아실은 그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빠져나가기는커녕 애인을 부둥켜안고 박자를 탔다.
선율이 바뀌자 아실의 발이 슬슬 안달을 냈다. 에스티니앙은 모른척했다. 술기운이 올라와 머릿속이 단순해진 탓에 충동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품에 꽉 차는 온기를 떼놓고 싶지 않았다. 선율에 멍하니 귀를 기울이다 보니 문득 사교 행사용으로 배웠던 왈츠가 떠올랐다. 꼭 이만큼 느긋한 곡에 췄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알려주면 좋아할 것이다. 아실은 축제 음악만큼 춤추는 일을 좋아했으니까. 가르쳐주랴, 물었더니 아실은 예상대로 호기심을 보였다.
“발은 이 정도로 벌리고, 손은 등에…. 그래, 그쯤. 그리고 시선은….”
홀드를 알려주던 에스티니앙은 자세가 묘하게 불편하다고 느꼈지만, 연습 상대가 남자라서 그렇겠거니 했다. 그는 팔을 크게 굽혀 아실의 팔 바깥쪽을 받쳤다. ‘처음에는 왼발부터 뻗어서….’ 설명을 이어갈수록 자꾸만 다리가 엉켰고 반대 방향으로 발이 나갔다. 에스티니앙은 인상을 쓴 채 발밑을 내려다봤다. 대체 뭐가 문제지? 아실은 그런 애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문질러줬다.
“근데 자기야, 짝을 이뤄서 추는 춤이면 아예 반대로 움직여야 하지 않아?”
에스티니앙은 그제야 왈츠 스텝이 두 종류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용기사단에서 대외 행사를 대비해 왈츠 교습을 했을 때, 그는 한 종류를 익히는 것도 벅차 남자 단원들의 연습 파트너에서는 일찌감치 배제됐더랬다. 홀드가 불편한 것도 당연했다. 둘 다 서로의 등을 받치려고 하고 있었으니까! 이래서야 왈츠를 가르쳐줄 수도 없었다. 스텝을 반대로 밟으면 된다지만 원래 말로만 떠드는 게 제일 쉬웠다. 이대로 끝내기는 아쉬운데. 에스티니앙은 고민했다. 문득 그는 왈츠를 배우지 않고 춤추는 기분을 낼 방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발 벗고 올라와라. 그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실은 몇 번이나 물었다. ‘안 무겁겠어?’ 에스티니앙은 코웃음 쳤다. 너 정도는 버텨. 아실은 결국 맨발로 애인의 신발 발등을 밟았다.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등을 단단히 받쳤다. 시험 삼아 발을 뻗어봤다. 무게는 그럭저럭 버틸 만했으나….
“힘 빼, 아실.”
아실은 그게 마음대로 되겠냐고 핀잔을 줬다. 에스티니앙의 품에 안긴 몸은 긴장을 풀고 기대어 왔지만, 위팔에 얹힌 손은 여전히 옷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에스티니앙은 맞잡은 손을 풀고 손바닥에 고인 땀을 아무렇게나 닦았다. 그러곤 다시 손깍지를 꼈다.
에스티니앙은 오케스트리온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캐럴에 맞춰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그는 애인을 떨어트리지 않도록 집중하느라 종종 틀린 스텝을 밟았다. 바닥을 미끄러지듯이 춰야 한다는 원칙은 처음부터 뒷전이었다. 에스티니앙이 발을 크게 움직이면 아실은 덩달아 발가락에 힘을 줬다. 아실의 발이 신발 위에서 꼼지락거릴 때마다 에스티니앙의 발끝에도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 탓에 에스티니앙은 상체가 지나치게 밀착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어긴 규칙이 한가득이다 보니 이제 와서 정석 홀드를 고수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이대로는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에스티니앙은 허리를 세우며 거리를 조금 벌렸다. 배운 대로 옆을 보던 아실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녹색 눈이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남의 발등에 올라타서 춤추는 게 생각보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술기운에 발그레 달아오른 뺨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이마가 닿고 날숨이 섞일 정도로 가까웠다. 에스티니앙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위팔을 잡고 있던 아실의 손이 반 박자 늦게 애인의 뒷덜미를 눌렀다. 노래는 계속 흐르는데 춤만 잠시 멈췄다.
입술이 떨어진 뒤, 아실은 꼭 신발을 신어야 되냐고 물었다. 발이 뜨는 느낌이 아슬아슬해서 슬슬 내려가고 싶다나. 발 시릴 텐데? 카펫에서 놀면 되지. 그래서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발등에 얹은 채 거실까지 뒤뚱뒤뚱 걸어갔다. 카펫은 무척 푹신푹신했다. 신발을 신고 있을 때도 어렴풋이 느끼긴 했지만, 맨발로 디뎌보니 한층 실감이 났다.
아실은 왈츠를 다시 춰보자고 했다. 이제 여자 스텝을 조금 알 것 같다면서. 그러나 에스티니앙의 춤은 빈말로도 좋은 교본이라 할 수 없었고, 당연하게도 아실이 유추한 동작 역시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둘은 맨발이라 다행이다 싶을 만큼 서로의 발을 밟아댔다. 넘어지려고 할 때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를 잡아당겼다. 요란한 사과와 숨 가쁜 웃음이 발과 함께 뒤엉켰다. 언제부터인가 왈츠도 무엇도 아닌 춤을 추고 있었지만 둘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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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티니앙이 설거지를 맡은 동안 아실은 물을 끓였다. 그릇을 모두 부실 즈음에는 물도 알맞게 식어 있었다. 그는 애인의 성화에 못 이겨 먼저 발을 씻기로 했다. 식탁 의자에 앉아 나무 대야에 발을 담갔다. 아실은 콧노래를 부르며 물을 끼얹었다. 비눗기 묻은 손이 나직한 캐롤 곡조와 함께 멍든 발을 세심하게 훑었다.
발치에 쪼그려 앉은 아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에스티니앙은 묘한 향수를 느꼈다. 하지만 그에게 맨발로 엉망진창 왈츠를 추고서 누군가에게 발을 맡겼던 추억 같은 건 없었다. 이건 지나간 어느 순간이 아니라 새로운 한순간이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찰랑거렸다. 아실의 손짓을 따라 발목께를 찰박찰박 간지럽히는 더운물처럼. 그때 아실이 물었다. 내년에도 이렇게 저녁 먹을까? 에스티니앙은 흔쾌히 동의했다. 좋아, 그땐 날짜를 잘 잡아보자고.
연인들이 이불 속에서 멍든 발을 나란히 꼼지락거릴 동안, 별빛축제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