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고백

-22090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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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진 주점 좌석을 간신히 비추는 어둑한 등잔 불빛 아래에서 에스티니앙은 눈을 피했다. 간신히 쥐어 짜낸 듯한 목소리로 ‘그렇군….’하고 대답한 게 다였다. 현실 도피조차 허락하지 않는 거절이었다. 맞은편에 앉은 아실은 몰래 혀를 깨물었다. 오랜만에 뼈저린 오판을 했다. 그것도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에스티니앙에 대한 인식을 재고하게 된 이후(그러니까, 샬레이안에서 그가 느닷없이 방에 찾아온 날 이후), 아실은 애정이나 욕망과는 얽힌 적이 드물어 보이는 이 사내를 어떻게 자빠뜨리면 좋을지 주의 깊게 관찰했다. 넘어올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따지면 전자에 가까웠다. 에스티니앙은 우정 바깥에서 미묘하게 줄타기하는 스킨십을 어색하게나마 받아주었다. 거기에 익숙해졌을 즈음에도 약간의 긴장감을 잃지 않았다. 의도를 눈치 못 챌 정도로 둔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관계가 싫다면 ‘착각일지도 모르겠는데’ 같은 서두로 말을 꺼낼 배짱이 있는 남자였다. 최소한 가능성은 있는 것 아닐까? 설령 하룻밤으로 끝난다고 해도 말이다. 아실은 그렇게 생각했다. 남은 건 서로 의사를 타진하는 일뿐이었다. 알아보는 사람이 적은 여행지의 주점에서 운을 띄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지금 와서 보니 단지 내가 그렇게 믿고 싶어 했던 것 같지만!

아실은 태연한 얼굴로 상황을 수습했다. 머릿속에서 후회와 수치심으로 배배 꼬이는 자아를 내버려 두고서. 정확히는 수습하려고 시도했다. ‘그렇지….’라고 맞장구를 치는데 발음이 저절로 잇새에서 갈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실수할지도 모르겠다는 직감이 머리를 때렸다. 아까의 고백을 구질구질하게 변명하거나 사이가 벌어질 빌미를 주게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런 일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자신을 되찾기 위해 자리를 피하는 게 관계를 해치는 행동을 하는 것보다 나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달아오른 뺨의 80％ 정도는 헛다리를 짚었다는 부끄러움 탓이었다. 차라리 내가 숙맥이라 호감 있는 사람 앞에서 얼굴이 빨개진 쪽이 더 낫겠어. 따져보면 끔찍한 건 마찬가지지만 이쪽은 귀엽기라도 하잖아. 엉망진창인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하려고 애쓰면서 아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 쐬고 올게.”

얼굴이 식을 때까지 써늘한 밤공기를 맞고 싶었다. 그러면 다음 전략을 세울 정도로는 정신을 차릴 수 있겠지.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해도 ‘그래서 내가 착각한 거라고?!’라는 경악으로 사고가 흘러갔다. 문제는 에스티니앙이 협조해주지 않았다는 거였다.

“어, 어, 어디 가.”

에스티니앙은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아실의 팔목을 꽉 붙잡았다. 아실은 잡힌 팔을 말없이 탈탈 털었다. 입을 열면 쌍욕이나 정제하지 못한 속마음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쟤를 계속 꾈지, 포기할지 모르는데 나서서 가능성을 줄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 신경을 긁을 때나 가능했던 판단이었다.

아실은 이 자식이 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이러나 싶었다. 무지막지한 힘이 팔을 갈고리처럼 움켜쥔 탓에 다음날이면 손가락 모양대로 멍이 들지도 몰랐다. 에스티니앙은 붙잡아놓고 정작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아실은 눈을 뾰족하게 떴다.

“놔. …안 놔?”

에스티니앙은 다시, ‘어디 가냐’고 물었다. 당장 떠오르는 말이 그것뿐인 것처럼. 평소의 아실이었다면 그쯤에서 무언가 눈치챘으리라. 불행히도 지금은 남의 속내를 헤아려줄 정도로 이성이 멀쩡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마음 정리하러 간다, 왜!”

가게 안의 다른 손님들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구석 자리에서 일어난 소동에 집중하기에는 주점이 너무 시끄러웠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안 들릴 테니 어차피 싸우는 줄 알겠지! 아실은 그런 생각으로 주위에 신경을 껐다. 덕분에 몇 마디 더 쏘아붙일 수 있었다.

방금 차 놓고서 자리는 비우지 말라니 대체 무슨 심보냐. 내가 왜 자리를 뜨려는지 생각 좀 해봐라. 실수하기 전에 머리 식히고 오려는 게 뻔하지 않냐. 무슨 힘이 그렇게 세서 사람 팔에 멍이….

에스티니앙은 그쯤 해서 팔을 잡아당겼다. 끌려가는 서슬에 균형이 무너진 아실은 앉아 있던 에스티니앙의 품에 쓰러졌다. 등을 안은 에스티니앙의 팔이 몸을 꽉 조였다. 뒤통수를 꾹 누르는 통에 한쪽 귀가 뺨과 가슴 사이에서 볼품없이 구겨졌다.

“아파!”

“미안….”

귀를 제대로 편 뒤에도 머리를 누르는 손은 여전했다. 뺨에 닿는 가슴이 의외로 푹신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아실은 볼이 눌린 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뭘 망설이는지 대꾸가 한 박자 느리게 돌아왔다.

“그…. 들어봐.”

뭘 들으라는 거냐고 묻기 위해 입을 벌린 순간, 아실은 들었다. 예민한 귀에 누군가의 심장 소리가 잡혔다.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빠르게 뛰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그 순간 아실은 지금 에스티니앙이 어떤 표정일지 무척 궁금해졌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이렇다 할 반응이 돌아오지 않아서인지 에스티니앙은 뒤통수를 누른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아실은 그를 마주 안는 것처럼 허리께에 팔을 둘렀다. 팔뚝을 두어 번 때린 뒤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온 얼굴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에스티니앙이 보였다. 라자한식 증류주를 항아리 단위로 동낸 뒤에도 희고 멀끔한 낯을 하고 있었던 사내가 말이다. 귀까지 빨개진 주제에 눈을 피하지 않는 게 참 그다웠다.

아실은 핥는 듯한 시선으로 에스티니앙의 얼굴을 감상했다. 민망한 듯 깊이 팬 미간의 주름부터 화살촉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코, 야트막한 입술 산까지. 말본새 험한 주제에 아직 코뼈가 내려앉은 적 없는 이유는 얼굴 덕이겠구나, 싶은 미남이었다. 그런 미남이 뺨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맞추는 광경이 무척 자극적이었다. 어쩌면 이 얼굴을 보기 위해 아직 살아있는 게 아닐까? 호들갑스러운 감상이 아실의 머릿속을 스쳤다. 정작 표정은 태연했지만.

“이게 대답이야?”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음, 역시 겉보기보다 훨씬 푹신한걸. 벗겼을 때가 기대되었다. 손바닥으로 가슴 한가운데를 살짝 누르자 아까보다 진정된 고동이 느껴졌다. 거기 집중한 나머지 아실은 하마터면 에스티니앙의 말을 놓칠 뻔했다. 심박수가 갑자기 치솟은 것이 징조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긴장한 듯 자기 입술을 핥는 에스티니앙이 보였다.

“아실, 나도….”

떨리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선명했다. 에스티니앙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주변의 소음보다도 요란했다. 아실은 문득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 긴장으로 꾹 다물린 사내의 입술이 그 순간 무척 탐났다. 가슴에 얹었던 손이 그대로 옷깃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손바닥이 목빗근을 지그시 훑었다. 손가락 끝에서 거센 맥박이 느껴졌다. 경동맥을 만지는 순간 에스티니앙은 움찔 놀라며 몸을 굳혔다. 이내 조심스럽게 온몸을 이완하고 목을 맡겼다.

아실의 손은 조금 더 올라가서 턱을 감쌌다. 열이 올라 뜨끈뜨끈한 귀를 손가락 사이에서 희롱했다. 얼굴을 살짝 끌어당기자 에스티니앙은 순순히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실도 마중을 나갔다. 몸을 가까이 붙이며 입을 맞췄다. 에스티니앙의 입술과 혀를 핥고 빨다가 눈을 감았다. 가슴이 뿌듯할 정도로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누구에게서 나는 소리인지는 귀가 예민한 아실도 구분할 수 없었다.

먼저 입술을 뗀 건 에스티니앙이었다. 숨이 모자랐는지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리고 헐떡거렸다. 아실은 첫 입맞춤을 거하게 치른 연인을 웃으며 놀렸다. ‘이대로 밤이 깊을 때까지 키스할 생각이었는데.’ 에스티니앙은 농담하지 말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입을 다물고 생글거리는 아실을 보자, 아무래도 반 정도는 진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의 여파로 아실의 얼굴 역시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뒤였다. 입술을 맞대는 동안 에스티니앙 쪽에서 아실의 뺨으로 홍조가 옮겨간 듯한 모양새였다. 아실은 머뭇거리며 다가온 손에 얼굴을 기대고, 살짝 고개를 돌려 손바닥이며 손가락을 깨물었다. 긴 입맞춤이 한 번 더 지나간 뒤에는 에스티니앙에게 편하게 몸을 기댔다. 연인의 심장 소리를 듣다가 깨달았다. 자신의 몸 안에서 울리는 것과 속도와 박자가 똑같다는 사실을. 아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겹쳐진 고동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