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애칭

-220908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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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가르드에 집을 사기 전까지 아실과 에스티니앙은 서로의 호칭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었다. 계기는 정교회의 결혼 의례며 언약식에 관한 얘기를 나누다 튀어나온 에스티니앙의 ‘자기야’ 운운이었다. 분위기를 탄 실언인 것치고는 아실의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 정작 에스티니앙은 이 기억을 곱씹을수록 스스로의 콧잔등을 때리고 싶어졌다. 이유 없이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생전 그래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그 뒤로 아실은 툭하면 자기야, 하고 에스티니앙을 불렀다. 에스티니앙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일이었다. 이슈가르드 문화를 잘 몰랐던 탓에 아실은, 한 번에 부르기엔 다소 긴 다섯 글자짜리 이름을 어떻게 줄여야 할지 종종 고민했다. 에스티니앙은 결국 방법을 찾지 못한 연인이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이름을 불러주는 걸 꽤 좋아했다.

아실이 그날 이후 에스티니앙의 입에서 ‘자기야’라는 말을 들은 적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대체로 다정한 연인이었지만 남을 놀릴 기회를 사양할 위인도 아니었다. 아실은 부끄러움 많은 연인에게 애칭을 조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에스티니앙은 곤란한 상황을 애교로 넘기는 기술만 늘었다. 처음에는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을, 나중에는 서툰 애교를 보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거란 깨달음은 뒤늦게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에스티니앙은 동거를 시작한 뒤 처음으로 아실과 오래 떨어지게 됐다. 둘은 그때까지 주로 함께 의뢰를 받았다. 한집에 살고 일정 조율도 자유로운 직업들인데, 일을 따로 받았다가 주말부부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아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거지가 이슈가르드다 보니 기밀 유지가 필요한 의뢰에는 종종 에스티니앙 혼자 불려가고는 했다.

요즘 아이메리크는 니드호그의 살아남은 권속들과도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흐레스벨그 측 용들이 사이를 중재해 주었으나 그것만으로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메리크는 사사로운 인맥으로 전직 푸른 용기사에게 호위를 맡겼다. 말하자면 이 동네에서 에스티니앙이 맡은 정기 일감이었다. 그걸 끝내고 돌아왔더니 새벽의 혈맹 쪽에서 교대하듯이 지원 요청이 와 있었다.

돌아왔을 때 아실은 이미 출장 준비 중이었다. 손이 비는 사람이 가면 될 정도의 일이라 꼭 에스티니앙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이틀 뒤에 떠난다는 얘기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아실은 에스티니앙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돌아온 첫날은 연인의 피로를, 그다음 날은 자신의 몸 상태를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일을 시작하기 전이나 끝낸 직후에 푹 쉬어야 몸이 축나지 않는다나.

당일 아침, 두 사람은 출발 시간에 맞춰 함께 식사했다. 나란히 이를 닦은 뒤 아실은 짐을 챙기고 에스티니앙은 식기를 씻었다. 쪼그려 앉은 채 그릇을 부시다가 인기척에 뒤를 봤다. 주방 문간에 선 아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지금 가는 건가?’ 묻자 ‘빨리 다녀올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스티니앙은 가볍게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뭘 잊어버린 것 같은데…. 자기야.”

그러고는 일부러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아실은 애칭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어진 제스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성큼 걸음을 옮겨 연인의 어깨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출발 전의 몇 분을 기꺼이 할애했다. 아침에 하기에는 다소 진한 키스였다.

집에 두고 온 애인 생각에 일이 손에 안 잡히는 경험이나 해보라는 심보로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며칠 뒤, 하루 이틀 내로 일이 끝날 것 같다는 연락이 왔을 때…. 에스티니앙은 마중 나갈 생각부터 했다. 제 꾀에 걸려 넘어졌음을 깨달은 건 모르도나로 날아가는 초코보의 등 위에서였다.

아실은 한달음에 달려와 폭 안겼다. 그 뒤로 오랜만에 얼굴을 보러온 알피노와 알리제가 서 있어서 에스티니앙은 살짝 민망해졌다. 일하는 도중에도 내내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는데 연인을 만나니 얼굴이 더 좋아지는 게 신기하다는 알피노의 감상은 덤이었다. 모르도나 건물 사이의 빨랫줄을 올려다보던 알리제는 쌍둥이의 눈치 없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아실이 웃고 다닌 이유를 짐작한 에스티니앙은 치밀어오르는 민망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이후로 에스티니앙은 애칭을 입에 담지 않았다. 맨정신일 때에는 말이다.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거나 취기가 올라 몽롱해지면 가끔 ‘자기야’하고 부르고는 했지만. 아실은 그걸 무척 재미있어했다. 당연하게도 꼬투리를 잡아서 놀렸다.

“정신없을 때 부를 정도면 평소에도 부르는 게 낫지 않아?”

에스티니앙은 ‘20년이 지나도 안 익숙해질 것 같다.’라고 투덜거렸다. 아실의 대꾸는 ‘그건 모르지.’였다. 급기야 내기까지 걸었다. 너무 멀지 않냐고 지적하려던 에스티니앙은 이내 깨달았다. 기한은 상관없었다. 기억하려고 거는 내기가 아니었으니까.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이삿날과 같은 거였다. 왠지 입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방금 성사된 판을 깨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그 대신 에스티니앙은 가볍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