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위로

-220908 작성

 

---

 

아실은 가끔 집안에서 실종되곤 했다. 이상할 정도로 기척이 없어 온 집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에스티니앙은 어디를 찾으면 되는지 알았다. 침실을 들여다보면 장신의 남성 둘이 덮고 자도 넉넉한 이불에 정자세로 누운 실루엣이 불쑥 솟아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은 애인을 볼 때마다 에스티니앙은 꼭 시체에 천을 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이 더울 때는 들숨에 얼굴 즈음의 실루엣이 선명해졌다가, 날숨에 얇은 이불이 살짝 뜨며 다소 흐릿해졌다. 추운 계절에는 두꺼운 이불 탓에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조차 티가 나질 않았다. 오죽하면 그 꼴을 처음 본 에스티니앙이 기겁하며 이불을 걷었겠는가?

이불을 걷어도 아실은 반응하지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늘 그랬던 것처럼 연인의 시야에 자신이 들어가게끔 몸을 숙였다. 아실은 그제야 동거인이 왔다는 걸 알아차린 듯, 시선만 쓱 돌려 위를 올려다봤다. 에스티니앙은 침대 정중앙에 누운 아실 곁을 익숙한 몸놀림으로 파고들었다.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팔이 허리를 감고, 그 아래로 다리가 단단하게 얽힌 뒤에야 불편한 티를 냈다.

“아실.”

“음.”

“이불 덮고 죽은 척하지 말고 날 찾으라고 했지.”

에스티니앙은 투덜거렸다. ‘그러다 진짜 숨 막혀 죽을 거냐? 날 두고? 응?’ 동시에 아실을 끌어안은 채 몸을 마구 흔들었다. 입술이며 목을 깨물고 침대를 반쯤 굴러 연인을 자기 몸 위에 올리거나, 아래에 깔았다. 평소에는 금방 타박이나 웃음이 터져 나왔을 텐데 이럴 때의 아실은 곤란한 듯한 신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래도 반응이 오기는 왔다. 이대로 딱 붙어서 체온을 나누고 자극을 주다 보면 머지않아 먼저 말을 꺼낼 정도로 상태가 회복됐다.

“나 말이지….”

애인의 품에 안긴 채로 아실은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결국 죽은 거나 다름없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아남았다는 말은 단순히 목숨이 붙어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적어도 아실에게는 그랬다. 하늘을 빽빽하게 가리며 자라난 나무들 사이에서 그의 일부는 늘 괴사 상태였다. 적응한 자가 곧 살아남은 자라는 논리 아래에서 아실은 산 채로 죽은 자였다. 수호자가 될 아이를 선별하는 기준이 다른 것이었더라도 그는 결국 도망쳐 나왔을 것이다. 거기서 더 버텼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아서.

정작 숲 밖에서 겪은 일은 숲 안에서 겪은 일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실은 가끔 생각했다. 어쩌면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계절이 바뀌면 그런 생각들은 우기를 틈타 웃자란 식물처럼 마음에 그늘을 드리웠다.

오랜 경험 덕분에 아실은 갑작스레 자라난 우울감을 말려버리는 법을 알았다. 맛있는 음식, 깊은 잠, 오후의 볕과 땀이 날 정도의 운동. 그러니까 지금 이건 그냥 궁상을 떠는 거였다. 놔두면 알아서 배를 채우든, 그대로 잠들든 할 텐데 에스티니앙은 어김없이 이불을 걷었다. 그러고는 예기치 못하게 마주친 무거운 화제 앞에서 쩔쩔맸다. 딱 지금처럼.

에스티니앙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말주변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자신의 머리카락만큼 길게 기른 아실의 머리카락으로 손장난을 칠 뿐이었다.

“하지만 종언을 노래하는 자 앞에서는 아니었잖아.”

이건 또 의외인데, 생각하며 아실은 위쪽으로 눈을 굴렸다. 말을 고르느라 우물거리는 잘생긴 턱선이 보였다.

“사람마다 한계점이 달라. 자기 몸에 대해선 허벅지가 날아가도 태연한데 동료의 깊지 않은 자상에 벌벌 떠는 녀석도 있었고…. 사령술로 되살아난 시체를 무서워하는 주제에 용 앞에서는 혼자 남아도 웃는 자식이 있었지.”

‘뭐 다 죽었지만.’ 습관처럼 추임새를 넣었다가 에스티니앙은 급히 수습했다.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너는 다른 사람들의 곤경에서 눈을 못 돌리는 것뿐이야. 정작 너 혼자만의 일에는 눈도 깜짝 않으면서 말이지. 그걸 견딜 수 있고 없는 문제로 축소해버리면 곤란해. 네가 괜찮다고 다 괜찮은 게 아니라고. 고생하는 널 보는 내 마음이 뭐가 되냐.”

게다가 아실이 고향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그거야말로 비극일 거라고, 에스티니앙은 덧붙였다.

“우리 별은 그대로 종말을 맞았겠지. 하긴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군. 나는 니드호그와 동귀어진했을 테니.”

‘네가 도망치면서 또 뭘 바꿨는지 하나하나 읊어볼까?’ 에스티니앙은 짐짓 을러대는 투로 말했다. 아실은 킥킥 웃었다. 없는 말주변을 동원해 열심히 위로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이런 게 연하 사귀는 재미인가, 싶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연인은 아직 안 끝났다며 아실을 품 안에 가뒀다.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치며 매트리스 위를 굴러다녔다. 이불이 마구 구겨져 침대 구석으로 밀려난 뒤에야 에스티니앙은 아실을 놔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