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제공: 휘몰님 발단은 아실이 의뢰비로 받아온 탁상용 오케스트리온이었다. 돈 대신 현물로 삯을 치르는 의뢰인은 드물지 않았으나 보수치고는 다소 뜬금없는 물건이었다. 아실은 덤으로 받아온 악보를 들으며 오케스트리온의 기능을 이것저것 시험해 봤다. 에스티니앙은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지만 집중한 애인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기다리고 있으면 알아서 조잘조잘 얘기해줄 터였다. 어떤 의뢰를 했기에 하필 이런 걸 보수로 받았는지,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 아실 본인이 원한 것인지, 오케스트리온을 어디에 두면 좋을지…. 그러나 아실은 에스티니앙의 기대를 배신했다. “별빛축제 기간에는 쉴 거지?” 갑자기 웬 별빛축제란 말인가? 에스티니앙은 의아함을 뒤로하고 대꾸했다. “일정은 없다만…. 뭘 하려고?” “당..

-230908 작성 에스티니앙은 비에 쫄딱 젖어서 귀가했다. 라자한에 우기가 찾아오면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우산을 깜빡 잊고 외출한 전직 푸른 용기사가 소나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은. 에스티니앙이 물을 뚝뚝 흘리며 숙소에 들어서면, 아실은 매번 그런 끔찍한 꼴은 처음 봤다는 듯이 질색했다. 그러고는 애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수 닦아주었다.에스티니앙은 유난 떠는 아실에게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이 나이가 되어서 누가 머리를 말려주거나 젖은 옷을 벗겨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아서 챙기는 습관이 들어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었다는, 이젠 별 의미 없는 가족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는 것도 할 만하니까 하는 짓이었고 말이다. 아실은 에스티니앙이 수건을 찾을 틈..

-250622 작성-소재 제공: 쇠약님 전쟁이 끝난 뒤로 에스티니앙은 이따금 펀데일을 방문했다. 지난 20여 년간 발길을 끊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였다. 문득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거나 근방을 지날 일이 생기면 겸사겸사 들르는, 딱 그 정도.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므로 누군가와 함께 갈 생각 역시 해본 적 없었다. 기껏해야 애인에게 몇 마디 얘기하는 정도였다. 최근 고향에 갔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거나, 근처까지 가는 의뢰를 받은 겸 다녀올 생각이라거나. 아실은 얘기를 들어주긴 해도 큰 호기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에스티니앙은 그 점이 편했다. 스승과 친구, 사연을 아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는 아실만큼 덤덤한 반응을 기대할 수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리다니아에서 끝나는 호위 의뢰를 수락하..

-250615 작성-드림 3주년 기념 글-주의: 이슈가르드 역법, 정교회 체계 관련 날조 에스티니앙은 아실의 생일을 제때 챙겨본 적이 없었다. 아실의 생일이 매년 ‘오늘 내 생일이야.’라는 선언과 함께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첫해의 선언은 여관 침대를 벗어나 창문을 열어젖힌 직후였고, 그다음 해는 바람이 잘 통하는 숙소 식당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하면서였다. 올해는 산책 도중 꽃 냄새가 난다며 한참 덤불을 찾아다니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에스티니앙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작년엔 며칠 더 빨랐던 것 같은데? 그에 대한 아실의 답변은 퍽 알쏭달쏭했다. “여름이 늦게 와서 그래.” 애인은 덧붙였다. ‘내 생일은 여름의 첫날이거든!’ 골모어 대밀림을 떠나기 전부터 쭉 그렇게 챙겨왔고, 워낙 여기저기 떠돌다 보니..

-250530 작성 에스티니앙은 하나뿐인 호적수가 격투에 이렇다 할 취미가 없다는 사실을 종종 애통하게 여겼다. 아실로 말할 것 같으면 땅바닥에서 구르나 침대에서 구르나 그게 그거라는 뜻을 고수했다. 그 탓에 둘 사이에서는 무기를 사용한 대련이 좀체 성사되지 않았다. “네가 거리만 좁히면 다 끝날 텐데 대련은 무슨 대련이니!” 상성이 나쁘다는 아실의 투덜거림 앞에서는 에스티니앙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이 대련을 위해 무기를 쥔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새벽의 혈맹이 울티마 툴레에서 귀환한 뒤, 아실이 올드 샬레이안에서 한창 요양 중이었을 때. 환자를 끌고 나간 건 아니었다. 치유사 대신 에스티니앙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긴 했지만, 자기 몸 하나는 끔찍하게 챙기는 아실도 아직 아픈 사람에게 무슨..